<뉴시스>
‘건설’과 ‘투쟁’으로 점철·지도 이념 꾸준한 변화 모색
52년 12월 박헌영 등 남로당 계열 몰락·김일성 권력 기반 공고화

 
1945년 10월 10일 개최된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 공식적 연원을 두고 있는 조선노동당은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고 있는 영도 기구로서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대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원칙의 고수를 주된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조선노동당 역시 창당 이래 대·내외적 정세 변화에 발맞춰 당의 지도 이념에서도 꾸준한 변화를 모색해 왔다. 특히 이런 변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일지도체계 확립과 후계 승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조선노동당의 역사는 권력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다.
 
당 창설기 (1945.10∼1956.8)
 
조선노동당의 실질적 모태는 45년 10월 10∼13일 평양에서 김일성의 주도 아래 통일적 독립국가건설이라는 목표로 내걸고 열린 조선공산당 사북5도 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결성키로 결정한 데서 출발한다.
 
북한은 이 때를 기념해 10월 10일을 당 창건 기념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노동당의 뿌리를 1926년 10월 만주 화전(樺甸)에서 김일성이 결성한 ‘타도제국주의동맹’, 당조직의 원류는 1930년 장춘(長春) 카륜에서 김일성의 주도로 결성됐다는 ‘건설동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조선 분국의 결성은 미·소 양국의 군대가 각각 남북에 진주하고 있다는 특수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었지만 당시 서울에 박헌영이 주도하는 당 중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김일성은 45년 12월 17∼18일 북조선 분국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되면서 분국 내에서 1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북조선 분국은 46년 8월 28일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신민당을 사실상 흡수해 북조선노동당을 창설했으며, 49년 6월 30일 남쪽에서 와해 직전에 있던 남조선노동당과 합당하면서 조선노동당의 기틀이 완성된다.
 
하지만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박헌영과 함께 당을 이끌게 된 김일성은 한국전쟁 시기에 잠재적 경쟁자를 차례로 숙청시켜 나가면서 단일지도체계 확립을 시도한다.
 
김일성은 50년 12월 21일 강계시에서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3차 천원회의에서 전쟁 수행 과정에서 오류를 범했다는 이유로 당 간부 및 군 지휘관을 대대적으로 비판한 것을 계기로 제2군단장 무정을 철직시키고 51년 11월 당 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당 조직부장 허가이를 좌천시키면서 당내 주도권을 장악했다.
 
특히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남로당 계열의 몰락을 가져온 52년 12월 당 중앙위 제5차 전원회의는 김일성이 당내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만드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 잔재와의 투쟁을 역설한 결과 이듬해 초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 핵심인사들 13명을 반국가, 반혁명 간첩죄로 무더기로 체포됐으며 55년 12월 박헌영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면서 남로당 계열에 대한 숙청은 마무리됐다.
 
정전 직후인 53년 8월5일 개최된 당 중앙위 제6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전후 복구건설의 방향을 놓고 중공업 우선을 주창했지만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 및 농업 발전을 고집한 일부 당내 인사의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특히 56년 2월 개최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한 것이 영향을 미치면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기반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어수선한 대외 정세 속에서 열린 56년 4월 제3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중앙기관 선거에서 김일성 계열 인사들이 핵심 요직을 장악하는 결과가 나왔다.
 
한편 제3차 당대회에서는 당규약 개정을 심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당 지도이념으로 명문화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반제·반봉건 민주혁명 완수’를 목표로 내세웠다.
 
비록 김일성의 측근들이 핵심 요직을 장악하면서 외형적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처럼 보였지만 제3차 당대회에서 봉합된 갈등은 56년 8월 30일 평양예술극장에서 열린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회의에서 상업상을 맡고 있던 윤공흠이 총대를 매고 당에 대한 김일성의 독재를 강력히 비판했지만 오히려 대다수 중앙위원들로부터 역공을 받고 자신을 비롯한 서휘, 리필규에 대해서는 출당 조치가 내려지고 최창익과 박창옥에 대해서는 당직이 박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김일성에게는 ‘8월 종파사건’이 자신에 대한 당내 지지기반을 확인시켜주고 오히려 단일지도체계 확립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일지도체계의 확립시기 (61.9∼67.5)

전후 중공업 우선을 내세운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외부 원조 및 내부 동원에 힘입어 53∼60년 7년간 공업 부문에서 비약적 성장을 이뤄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조짐이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하더니 61년 9월 11∼18일 개최된 제4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김일성의 1인 권력은 더욱 공고화됐다.
 
제4차 당대회를 전후로 북한에서는 빨치산 회상기 및 김일성 저작에 대한 학습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지면서 김일성 유일지도체계 확립을 위한 사상적, 문화적 기반을 마련되기 시작했다. 제4차 당대회는 이런 경향을 반영해 제3차 당대회에서 당 지도이념으로 확정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항일무장투쟁의 혁명 전통을 추가시키고 대내적 목표로 사회주의 제도의 강화 발전을 목표로 내걸었다.
 
특히 66년 10월 당 중앙위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장 및 부위원장직을 폐지하고 총비서 및 비서제를 신설하면서 김일성은 유일지도체제 관철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67년 1월 중국의 문화혁명을 주도했던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난하고 박금철, 김도만, 허석선, 이효순 등 이른바 ‘갑산파’들이 과도한 개인숭배 경향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김일성은 또 한번 도전에 맞닥뜨렸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의 도움으로 67년 5월 4∼8일 당 중앙위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갑산파를 숙청하고 68년 말 민족보위상 김창봉과 허봉학 대남총책 등 군 수뇌부에 대한 숙청까지 끝내면서 유일지도체계 확립에 필요한 확고한 권력 기반을 마련했다.
 
김일성 유일지도체계는 70년 11월 2∼13일 제5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제도의 승리를 최종 목표로 내걸고 당 지도이념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표방, 사상적 기반까지 마련돼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후계 구도의 완성(66.6∼80.10)
 
김정일이 66년 6월19일 당 중앙위 지도원으로 당무를 시작하면서 김일성은 권력승계에 대한 구상을 하나씩 실천해나기기 시작했다.
 
특히 김정일은 67년 5월 갑산파에 대한 숙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당내에서 문화예술 부문을 장악하는 한편 유일지도체계 확립 운동을 전국적 범위로 확장시킨 공로 등을 인정받아 74년 2월 13일 개최된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 정치위원에 선출되면서 후계자로 내정됐다. 김정일은 정치위원 피선 직후인 2월 19일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선포하고 그해 4월 14일에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을 발표했다.
 
이후 김정일은 91년 12월 24일 개최된 당 중앙위 제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93년 4월 9일 국방위원장으로 각각 선출되면서 군권을 완전 장악했다. 김정일은 부친 사후인 97년 10월8일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면서 형식적으로도 권력 승계를 완전히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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