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7대 국회의원 선거전을 지켜보면서 느낀 소회가 자못 깊다. 과거 선거 때 횡횡했던 마타도어가 여전했던 것도 사실이고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네거티브 전략이 유권자를 피곤하게 했던 부분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정책적 호응도를 높이겠다는 포지티브 전략이 나타난 것은 종래의 선거전과 판이해진 모습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또 강력해진 선거법에 의해 금품 선거가 거의 사라지고 오히려 선거 불황이란 말이 나올 정도가 된 것은 다소 인간성 황폐화의 부정적 측면을 제외하고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성 황폐화를 지적치 않을 수 없는 것은 선거전이 시작되기 벌써 이전 시점에 지역 국회의원 신분으로 현지 식당에 밥 먹으러 들렀다가 우연히 만난 지역 인사들과 인사를 겸한 호의적 대화를 나누고 떠나면서 동석했던 몇 사람 밥값 낸 것이 당시 동석자의 고발에 따라 사전 선거운동혐의로 입건되는 사례에서는 법을 따지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갈수록 무서워지고 있는 점을 우려해서이다. 하긴 과거 타락선거가 나라 전반에 미친 악영향을 생각하면 비록 새 선거법이 인간사회의 인지상정을 각박하게 유도하는 부정적 측면이 있어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일지 모른다.

유권자들이 열망하는 것은

정치권은 4·15 총선정국이 시작되면서 일어난 민심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이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열망하고 있는가를 모르지 않을 터이다. 이제 국민은 아픈 과도기를 겪으면서 얼마간 비정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치권의 정략에 의해 무작정 끌려 다니지는 않겠다는 속내가 분명해졌다. 그걸 알기 때문에 한나라당 박근혜대표가 대국민 변명을 접고 법당에 엎드려 고뇌에 찬 108배를 드리고 성당을 찾아 고해성사하는 수순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빌었기에 적잖은 유권자들이 비감해하는 박근혜대표의 처지를 감싸서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여론의 저울추가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주당의 추미애의원 역시 구구한 소리를 내지 않고 새천년 민주당의 근간이 됐던 광주로 내려가 3보1배의 고행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과거 지지층의 회초리를 자청하는 아픔을 나타냈다. 이런 추의원의 행동이 속 들여다보이는 얄팍한 정치 쇼 라고 힐난하는 여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추의원의 비장해 보이는 표정이 전파를 타면서부터 약간씩 반등의 기미를 보여 그나마 민주당의 추락에 제동을 걸 수가 있었다.

인지상정의 철학은 살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세상인심이 칼날처럼 예민해지고 혹한의 얼음덩이처럼 얼어붙어도 인지상정의 인간사회 철학은 바닥 깊숙하게 뿌리 내려 있음을 크게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채찍과 용서가 더욱 분명해진 듯한 유권자들의 성숙됨이 이번 선거 정국을 통해 나타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말하자면 국민여론을 무시하는 정치권의 당리당략을 방관하지 않을 뿐더러 그에 따른 국민적 분노를 이용해서 반사이익을 도모하는 책략에도 동의하지 않는 유권자들의 현명함이 이번 선거전을 통해 드러났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태도가 명백해진 유권자들이기 때문에 열린 우리당의 정동영의장이 대통령 탄핵안 가결직후 ‘제가 죄인입니다’를 외칠 때 정의장의 비감함에 공감해서 엄청난 역풍을 만들어 냈고 그에 힘입은 열린우리당의 기세는 마치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그러나 냉정해진 유권자들은 힘 얻은 자의 오만까지를 수용하지는 않겠다는 움직임이 뚜렷했다.108배를 드리는 박근혜대표의 고뇌를 안타까워하는 여론이 확산됐는가 하면 추미애의원의 3보1배 고행이 진심어린 자기성찰의 표출로 비쳐져 적어도 호남지역에서 사그러드는 민주당 불씨를 새로 지핀 것이 사실이다. 유권자들의 의식이 이 정도라면 이제 우리는 금권선거, 관권선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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