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9월 17일까지 ‘30스튜디오’에서 공연하는 연극 <노숙의 시>는 연극만이 보일 수 있는 형식적, 내용적 자유를 전한다. 소극장, 2인극, 간단한 무대 소품으로 구성되는 연극의 잠재력을 전한다.
 
<노숙의 시>는 배우가 대사와 연기를 통해 적극적으로 판타지를 불러도 현실성을 잃지 않는다. 환상을 제시한들 현실감각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초라해서' 가질 수 있는 비극이자 현혹시키지 못하는 비극이며 초라해서 가지는 균형이자 연극에서 누리는 착각과 자유다. 작품의 해석과 감동은 관객 몫이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성립된다.
 
<노숙의 시>가 근현대사에 판타지를 주입할 때 관객은 어두운 현실을 연상한다. 구체적 현실과 추상적 풍경이 수시로 교차하는 흐름 속에서 판타지는 겉으로 거론하는 비중만큼의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다. <노숙의 시>는 판타지를 본래 의미대로 활용하기보다는 형식적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판타지가 현실을 넘도록 기다린다.
 
<노숙의 시>에 흐르는 전반적 비장미는 현실적 긴장감을 조성해 언어적 판타지를 제압한다. 배우의 연극적 톤, 그 비장한 감정과 목소리만이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를 구축한다. 극 속 무명 씨는 눈앞의 김 씨가 아닌 군중에게 전하듯 말을 꾹꾹 눌러쓰듯 뱉는다. 매순간 볼드(굵기가 두꺼운 글자체) 처리를 하는 것 같은 그 목소리는 딱딱하고 어두우나 초라한 연극의 힘, 목소리 자체의 판타지를 상기시킨다. 무명 씨가 언어를 소리로 바꾸는 과정은 기대 이상 대단해 글자와 책은 목소리의 아류, 대량생산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복사하고 담을 수 없는 실제 목소리의 힘은 다른 요소가 목소리를 제압하지 않는 <노숙의 시> 같은 연극에서나 깨어난다. 반대로 무명 씨의 더러운 얼굴과 옷차림은 그 목소리에 담긴 힘을 깎아내린다. 그가 사실을 얘기할 때 사실은 환상에 지나지 않고, 환상을 얘기할 때 환상은 그의 비 신뢰성 속에서 다시 잠든다.
        <노숙의 시> 옆에는 역사적 비극이 흐른다. 2017년에 굳이 불러온 비극의 강에는 대한민국 권력에 짓밟힌 민중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얘기는 관객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 다소 얼떨떨하고 혹은 너무 자주 들어서 무감각하다. 사실은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노숙의 시>는 현실과 판타지, 그 슬픔의 알레고리로 관객의 무감각을 예민하게 바꾼다. 초라한 무대 위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흘러도 괜찮을 것 같은 이 비극은 끝내 현실이 믿기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간다. 연극을 관람하고 다시 어떤 권력 밑으로 돌아가야 하는 관객들은 (그런 자신을 인지하지 않은 채) 현실 너머 ‘북쪽 숲’으로 가는 김 씨를 본다. 공중화장실과 그 옆 벤치에서 덜컥 북쪽 숲으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다른 예술보다 얇은 연극적 특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유독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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