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지도자 유골 사진 (사진=소설 '봉기'의 작가 서주원씨 제공)
국내 봉환 뒤 안장 잇따라 무산…뒤늦은 지자체 간 다툼에 또 표류
소설 ‘봉기’ 서주원 작가, “인도적 차원서 영면할 곳 찾아 예의 갖춰야”

 
일본군에게 목이 잘린 뒤 120년 넘게 방치됐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遺骨)이 여전히 영면(永眠)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전북 정읍(井邑)의 황토현 전적지에 안장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뒤 전북 전주시와 전남 진도군이 서로 자기 지역에 모시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 안장까지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유골에 얽힌 사연과 안장이 늦어지는 이유, 해결 방안을 짚어본다.
 
유골에 얽힌 사연
 
이 유골은 1995년 7월 일본 홋카이도대학의 옛 서고에서 발견됐다. 방치된 종이상자에 들어 있던 이 유골에는 ‘효수된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머리)’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으며 ‘1906년 진도 시찰 중 채집됐다’는 쪽지도 발견됐다.
 
유골을 일본으로 가져간 사람은 당시 진도의 임시 면화재배소 기사로 근무했던 사토 마사지로였다. 목이 잘린 채 100년 가까이 방치됐던 이 유골은 이듬해 국내로 봉환됐고 신원 규명을 위한 조사가 진행됐다. 두개골에 남아 있던 치아 등에 대한 DNA 감식 등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제 이 유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사실상 확인할 방법이 없는 상태다.
 
애초에는 유골은 전남 진도 출신의 농민군 지도자 박중신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진도에서 활동하다 처형된 진도 출신의 손행권, 김윤선, 김영욱, 서기택 등 4명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키가 1백50㎝ 정도라는 의학적 사실과 박중신의 키가 매우 컸다는 주민의 상반된 증언이 논거다.
 
이 유골이 일본으로 건너간 까닭 역시 사토 마사지로의 개인적인 수집인지, 아니면 일본 정부의 요청이나 묵인에 의한 인골 수집활동이었는지도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봉환 이후 20년간 뭐 했나?
 
국내로 봉환된 유해는 신원 확인 절차를 밟다가 뒤늦게 2001년부터 안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전남 진도에서 처형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진도에 모시는 방안이 추진됐다.
 
진도군은 동학농민 혁명군이 대규모로 참수된 진도군 진도읍 일대에 유해를 안장한 뒤 동학농민혁명역사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학술용역까지 진행했다. 그러다가 돌연 ‘진도 출신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역사공원 조성계획을 철회하고 유골 안장에서도 손을 뗐다.
 
2009년을 전후한 일로,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후 10여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전주역사박물관의 차가운 지하 수장고에 보관된 채 뇌리에서 잊혀가던 유해는 지난 2014년 4월 다시 세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동학농민혁명의 고장’을 자처하는 전북 정읍시가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유골을 황토현 전적지에 모시는 계획을 수립하고 당시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스님이 전주역사박물관을 찾아와 조속한 안장을 촉구하면서다.
 
정읍시가 유해를 안장할 장소를 정하고 예산 지원까지 약속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안장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더이상 유해 안장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유해를 보관하던 전주역사박물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도 동의한다는 뜻을 전해왔다.
 
장소는 황토현 전적지로 정해졌고 지난 2014년 11월 21일로 안장 날짜까지 의견이 모아졌다.
각계각층 인사로 안장 추진위원회가 꾸려졌고 구체적인 안장 행사 계획도 확정됐다. 그러나 안장을 목전에 두고 예기치 않은 변수가 생겼다.
 
당시 문화재청이 ‘정부가 2017년까지 황토현 전적지 안에 조성할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의 희생자 묘역에 모셔야 한다’며 제동을 건 것이다. 조만간 희생자 묘역이 조성되는데 굳이 사적지인 황토현 전적지를 훼손하면서까지 안장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나 몰라라’ 하던 지자체들,
‘우리 지역에 모시자’ 급선회

 
안장이 무산되자 이번에는 전북 전주시가 나섰다. 전주시는 2015년 2월 유골을 동학혁명의 유적지인 완산공원 안에 안장하고 이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만여㎡ 규모의 공원에는 묘역과 함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상징적인 조형물, 홍보·교육관, 전시·체험시설 등을 갖추기로 했다. 순항하던 안장 논의는 그러나 다시 한번 예기치 않았던 반발에 부닥쳤다. 전남 진도군이 ‘유골의 고향이 진도인데 왜 전주에 모시냐’며 문제 제기를 한 것이었다. 그해 3월의 일이다.
 
진도군과 진도군의회, 진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은 “유골이 전주에 안장돼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한 부당한 처사”라며 문화체육관광부에 봉환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진도군 등은 유골을 봉환 받은 뒤 이 동학지도자가 참수됐던 곳에 역사공원과 전시관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재에 나섰으나 전주시와 진도군은 한 발짝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이후 안장은 현재까지 표류하고 있다.
 
“문화관광자원으로 보는 비인도적 처사”…
인도적 차원서 영면하도록 예의 갖춰야

 
유해를 둘러싼 자치단체 간의 이런 다툼은 유해를 문화·관광 자원으로만 보는 비인도적 시각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이미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만큼 유해를 모시면 ‘동학혁명의 성지’라는 지역 이미지를 만드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수학여행단을 비롯해 관광객을 유치할 좋은 문화·관광 자원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
 
동학혁명 관련 전문가들은 자치단체들이 뒤늦게 유해를 놓고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런 ‘상품성’에 눈을 떴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소설 ‘봉기’의 작가 서주원 부안적폐청산군민연대 상임대표는 “목이 잘린 지 120년, 국내에 봉환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나 몰라라 했던 자치단체들이 이제 와서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유해의 안장을 막고 나선 것은 서글프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나라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려다 학살된 동학지도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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