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 화악산, 운문산, 가지산, 재약산... 신기하게도 밀양은 온 사방이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빼곡하게 둘러싸여 인근 지역들과 경계를 이룬다. 내밀한 공간에 따뜻한 빛이 안전하게 내려앉으면, 비밀의 볕이라는 밀양이 비로소 완성된다.
 
밀양은 과거 부산의 동래부, 대구부와 함께 교남영남지방을 대표하는 3대 주요지였다. 경남지방에서 경북지방으로 넘어오려면 대부분 이곳을 거쳐야 했고, 반대의 경우도 물론 그랬다.

두 곳의 문화를 받아들여 결국 경상지역의 남과 북을 잇게 했으니 서로 간 전하지 못한 속 깊은 얘기들을 얼마나 많이 받아들이고 또 간직하고 지냈을까. 그런 이곳에 비밀의 밀(密)자가 붙은 것이 밀양의 정신이요, 밀양의 숙명이었다.

게다가 볕 양(陽)자가 따라붙어 비밀의 양지라는 이 비밀스런 시정이 넘치는 고을을 완성했으니 한반도에 이처럼 포근하게 숨긴 사연을 품고 있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곳은 또한 밀양일 터이다.
 
           보물을 넘어 국보로 영남루

밀양 제1경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치를 보여주는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의 하나로 꼽혀오고 있는 누정 건축의 최고점으로 현재 보물 제147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헌종 10년(1844년)에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신라시대에 창건된 영남사의 바탕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영남루의 역사는 천 년이 훌쩍 넘는다.

중심 건물인 본루를 기준으로 좌우로 침류각과 능파당이 이어져 있으며 부지 내에 각 부속건물들과 관련 시설들이 조성돼 있다. 한국적인, 유려하되 강직한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누각 말고라도 영남루의 미적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무수히 많다.
           건물 내부에 장식돼 있는 당대 문필가들과 문장가들의 친필 현판들이 그것. 특히 신화처럼 내려오고 있는 당시 11세와 7세에 불과했던 이인제 부사의 아들들이 쓴 영남제일루와 영남루의 현판은 이곳을 대표하는 서체로 명성이 높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 힘차고 격조 높은 필체에 경탄과 감탄할 따름. 파도가 능을 이룬다는 능파당을 통해 누각에 올라 유려한 곡선을 이루며 흘러가는 밀양강을 굽어보는 일은 전 조선을 통틀어 16경 중 하나로 꼽혀왔던 밀양의 전부이자 밀양의 시작점이다.
           안전과 본루의 보존을 위해 각 1회 당 80명의 제한된 인원만이 누각에 오를 수 있도록 하고 있어 밀양 사람들의 영남루에 대한 애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현재 영남루는 문화재청에 의해 국보 후보로 선정돼 심의를 받고 있다. 미리 축하를 건네 본다.

천진궁

영남루의 부속건물인 맞은편 천진궁도 주목할 만한 건물이다. 조선 1652년, 효종 3년 창건된 건물로 만덕문을 통해 들어설 수 있다. 꾸밈이 없는 단정한 건물이지만 왠지 모를 엄숙함이 작은 공간에 서려있다.
          중앙 맨 윗자리에 단군의 영정과 동쪽 벽의 부여, 고구려, 가야, 고려의 시조 그리고 서쪽 벽에 신라, 백제, 발해, 조선의 시조 등 이 땅에 존재했던 한민족 역대 여덟 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기 때문.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위패를 땅에 묻고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했지만 의연하게 버텨 남은 천진궁. 이 땅의 주인을 모시고 있는 곳이니 영남루와 함께 있는 것이 옳다.
 
         아랑각

영남루에서 밀양강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조선 명종 때 밀양부사의 외동딸이었던 아랑 낭자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아랑각이 마치 숨겨져 있듯 살포시 자리하고 있다.
         어느 밤, 영남루에 달마중을 나왔던 아랑 낭자가 괴한을 만났지만 죽음으로써 순결을 지킨 것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작은 크기이지만 결코 영남루의 품격에 조금도 누가 되지 않는 건물이다.
         내부에는 고운 모습의 아랑 영정이 있어 현실감을 더한다. 비탈의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면 소소한 소리에 어린 한이 들려오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민요인 밀양 아리랑의 기원이 바로 아랑 낭자의 설화에서 시작됐기에 학술적으로도 귀중한 공간이다.
 
        한국의 미, 표충사

양산 통도사의 말사로 1200여m의 재약산 아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표충사. 밀양 최고의 명찰인 표충사의 창건 시기는 654년으로 신라의 태조 무열왕 원년에 원효대사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이래로 죽림사, 영정사 등으로 불렸지만 현재는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린다. 표충사로 오르는 계단에 수놓인 연등의 배열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사천왕상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우선 고즈넉한 마당에 놓여있는 단순한 모습의 3층 석탑이 눈에 띈다. 허투루 꾸미지 않은 단아하고 정갈한 탑. 바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3층 석탑. 현 시대 미니멀리즘에 대한 찬사의 한국식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플하지만, 절제와 균형 그리고 비례와 대칭이 이루는 구조는 조용한 산사에 더없이 어울리는 명품이다.

보물 467호. 석탑 앞에 외따로 자라고 있는 매화나무와의 조화로움도 놓쳐서는 안 될 표충사의 숨은 그림. 표충사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표충사당이 있어 사찰의 격을 유지하며, 사계절 내내 절경을 이뤄 표충사 사계가 밀양 8경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이다.

하루쯤 표충사에서 조용하게 마음을 닦아 보는 것은 어떨까. 마침 템플스테이를 운영 중이다.
 
       의병장 사명대사의 흔적, 사명대사 생가지

사명대사 생가지는 밀양의 서쪽 창녕과 맞닿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한반도 최고의 명당 중 한 곳이라는 영취산과 황산이 만나는 자락에 있다. 조선의 승려로 유정이 속명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 해 한국 호국승병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전설이자 실존인물, 사명대사.

그는 13살 되던 해 스스로 출가해 승려가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유적지는 밀양시 자체에서 관광단지로 조성한 까닭에 시설과 환경이 나무랄 데 없이 쾌적하며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생가지와 함께 위치하고 있다.
<사진제공=밀양시청>
      참배로를 따라 상징광장을 지나면 사명대사 기념관으로 이어진다. 광장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와 치열하게 싸웠던 사명과 승병들의 활약상이 묘사된 타일 벽화가 잘 꾸며져 있어 현실감을 더하며 기념관은 만남, 이해, 확인 등 세 구간으로 분류돼 이해를 돕는다.

당시의 전투를 실감나게 표현한 전시물들과 사명이 사용했다는 승복과 염주 등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으며 그의 친필문서도 보관돼 있어 사명대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사명대사 기념관보다는 사명대사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곳.

밀양의 기적, 얼음골

전국에 얼음골이라 불리는 곳이 20여 군데가 있다고 한다. 전북의 진안과 울릉도의 저동, 경기도의 연천과 경북의 청송과 의성 등. 하지만 밀양의 얼음골이야말로 이 얼음골 루트에서 가장 먼저 등장해야 하는 곳이 아닐까.

영남루, 표충사와 더불어 밀양을 대표하는 여행지로, 또 표충비와 한겨울에도 날아다닌다는 태국나비, 부봉암 죽순과 함께 밀양의 4대 기적으로도 불리는 얼음골.

아이러니하게도 추울 때는 다소 따뜻한 기운이,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더욱 차가워지는 얼음골 지대는 얼음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주변이 온통 서늘한 냉기가 서려 얼핏 비밀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충분히 밀양을 대표할 만하다.
 
<사진제공=밀양시청>
     이무기와 용의 전설, 호박소

얼음골에서 내려와 2km 남짓 백운산과 가지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호박소가 모습을 보인다. 호박소 입구에는 곧고 길게 뻗은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어 어딘지 차분함을 더한다. 호박소는 절구통의 옛날 경상도 사투리인 호박을 닮았다 해 호박소라 불린다.

둘레 30m 규모에 깊이가 6m가 넘어 생각보다 넓고 깊다. 날씨가 화창한 날 백옥처럼 하얀 화강석 위로 쏟아지는 계곡물의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 큰 이무기가 글을 읽고 용이 돼 호박소에 잠겼다는 전설이 있으며, 만어사와 더불어 밀양의 대표적인 기우처로 알려져 있다. 밀양 8경 중 하나이며 시례호박소 또는 구연폭포라고도 불린다.
 
<사진지공=밀양시청>
     비밀의 박물관, 만어사

표충사와 마찬가지로 역시 통도사의 말사이지만 그것은 종교의 행정적인 구분일 뿐 격이 모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득하고도 먼 옛날인 46년 신라 김수로왕에 의해서 창건된 만어사는 유독 비밀을 많이 간직해 밀양의 비밀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먼저 만어사로 오르는 길에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검은 돌무덤은 기이함과 동시에 신비감을 전해준다. 먼 옛날 동해에 사는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고 이곳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이 큰 미륵돌로 변했으며 용왕의 아들을 따르던 수많은 고기들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는 전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만어석이라 불리며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 종석이라고도 불린다.

조선 세종 때 이 돌로 종경이라는 악기를 만들려고 했으나 음률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도 전해진다.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던 사찰로도 특별한 영험을 지닌 만어사. 만어석 이외에도 눈길을 끄는 것은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고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이다.

용왕의 아들이 만어석과 함께 변한 돌로 붉은색이 감도는 겉 표면이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다고 해 신비로움을 더한다.
 
    밀양의 숲, 기회송림

밀양 사람들의 휴식을 책임지고 있는 기회송림. 나지막하게 흘러가는 밀양강을 따라 수령 120년이 넘는 소나무 9500여 그루가 1500m에 이르는 구간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예전 기회마을에 해마다 밀양강이 범람해 가옥과 전답에 피해를 입자 주민들이 방수림으로 심은 나무들이 커다란 숲을 이룬 것.

적송이 주를 이루며 해송도 드문드문 섞여 있다. 송림으로 들어서면 높다랗게 자란 소나무들이 웅장하게 맞이한다. 특이한 모습으로 비스듬하게 자라거나 옆으로 길게 뻗은 소나무들이 많아 오래전부터 내려오고 있는 신화나 설화를 간직할 법도 하지만 단순히 태풍에 의한 것이라는 안내자의 전언. 의도적으로 꾸미지 않은 송림이라 더욱 반갑다.
    ‘산외긴늪유원지’라고도 하며 캠핑이 가능하지만 매년 11월부터 4월까지는 송림의 보호를 위해 폐장한다. 밀양사람들이 기회송림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마음. 전국적으로 소나무숲이 많지만 이렇게 도심 한가운데에서 시민들과 함께하는 송림은 그리 흔치 않다.

영화 <밀양>에서 부흥회를 개최하는 장소로도 등장했던, 단순하지만 지나치기엔 아까운 밀양의 숨은 여행지.
 
    작지만 큰 연못, 위양못

위양못은 밀양에서도 가장 외딴 곳인 부북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평범한 농업용 저수지로 보이지만 주변 환경이 어우러질 때면 가히 밀양 8경 중 하나에 들 정도로 극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역사의 깊이는 뒤로하고라도, 5월 경 주변의 이팝나무들이 쌀알이 맺히듯 하얗게 꽃을 피우고 푸르른 녹음과 수면에 비친 풍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전국 사진가들의 출사장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가을 단풍시기에도 버드나무가 붉게 물든 위양못의 풍경이 여전하다고 하니, 일 년 내내 위양못의 다양한 사계절 풍경이 어떨지 사뭇 궁금하다. 주변 한 바퀴를 도는 산책에 30분 정도가 소요되며 평일에는 사진에 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 말고는 그리 북적이는 곳이 아니라서 호젓한 연못 산책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
   예전보다는 물이 말라 다소 아쉽다. 위양못에는 작고 아담한 정자가 하나 있는데 완재정宛在亭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던 안동 권 씨 가문의 권삼변이 돌아와 지은 정자로 후손들이 재건축했으며 현재에도 안동 권씨 가문이 관리하고 있다.

<사진제공=여행매거진 G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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