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삶이라는 현기증’, ‘조국과 조국이 될 수 없는 미국을 유랑한 슬픈 영혼’. 연극 <에어콘 없는 방>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글귀로, 작품 프로그램 북에 수록된 작가·연출 인터뷰와 연출의 말이다.
 
10월 1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는 <에어콘 없는 방>은 1900년대부터 작품의 기본 배경인 1975년 호텔방 사이를 오간다. 미국과 대한민국의 공산주의자 색출 그리고 자본주의의 핍박 속에서 연명한 공산주의의 동력과 이상성을 그린다. 미국 이민자의 차별과 설움을 일제강점기나 광복 후 독재정권과 접목해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약간의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에어콘 없는 방>이 다루는 역사적 사실은 많고 또 무겁다. 피터 현이라는 실존 인물의 무게는 작품 속 개인의 기억과 혼란과 환상을 내용으로나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한다. 피터 현의 머릿속처럼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찾는 일은 모호해진다. 경계를 짚는 일은 애매하고 어려운 것 이상으로 조심스러워진다. 동정심이 깊은 사람은 역사의 희생자를 보며 슬퍼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역사적 기록이라는 정보 앞에 주눅이 들어 그 외적인 일상성을 분리하지 못해 지루할 것이다. 다만 연극 <에어콘 없는 방>은 무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원형 객석 구조로 역사극의 무게를 다소 덜어낸다. 내려다보는 구조적 시선의 ‘권력’과 ‘자유로움’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한다.
   <에어콘 없는 방>이 일제강점기와 유신 시대를 대하는 시선은 유머러스하고 진보적이며 정치적으로 들뜨게 한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이 현실 밑에 깔리는 광경, 특히 미국과 대한민국의 잔인하고도 화려한 광경을 피터 현이라는 ‘민중’의 머릿속에 담아 표현한다. 그 혼란과 환상은 시대적이고 개인적이며 상대적이고 보편적이다. 작품은 억압과 폭력에 끝끝내 저항하다 쓰러진 남자, 오랫동안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남자를 비추며 연민과 공감,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에게 <에어콘 없는 방>의 진행은 어려운 편이다. 그럴 때는 피터 현에게 씌워진 역사성을 걷어내고 한 사람의 외로움과 절실함, 그리고 고통에 집중해야 한다. 비범한 인물이 소유한 역사성은 그의 외로움과 슬픔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 정도에 불과할지 모른다. 피터 현은 재능이 있음에도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씻을 수 없는 좌절을 겪었다. 그가 불굴의 투지나 탁월한 망각 따위로 좌절을 극복했다는 사실은 없다. 그는 자신의 태생적 성향으로 역사의 줄기에 휘말리고 때로는 뛰어들었다. 그의 선택은 비범함과 관계가 없을 때도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이상성이 실패하듯 그는 실패한 인간임을 스스로 단정한다.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후회와 회한에 몰입한다. 그 반복은 수많은 천재성과 감수성이 역사적 폭력 앞에 훼손당한 증거다. <에어콘 없는 방>을 통해 한 남자의 일대기를 따라간 사람들은 그 실패가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역사의 실패임을 결국 인식한다. 마지막 장면의 순수성을 먹먹하게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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