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26일 이른바 ‘개구리 소년’으로 알려진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 15년이 지났다. 1991년 우철원(당시 13세)·조호연(당시 12세)·김영규(당시 11세)·박찬인(당시 10세)·김종식(당시 9세)군 등은 대구 와룡산에서 실종, 11년이 지나 유골이 돼 나타났다. 유족들은 아직도 당시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들은 경찰이 사건을 은폐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내놓고 있다.
 
지난 26일 이날을 기리는 1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행사에는 유가족과 시민단체 관계자 등 20여 명이 참석해 간소하게 치러졌다. 참석자들은 26년 전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가 살해된 개구리 소년들의 넋을 위로했다.
 
우철원 군의 아버지 우종우(66)씨는 추도사에서 “도롱뇽 알을 잔뜩 주워 돌아올 줄 알았던 아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며 “무엇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대체 누가 한 것인지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아이들을 마음 편히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개구리 소년 실종 이후 정부는 현상금 4200만 원, 군·경 등 연 32만 명의 인력을 투입해 아이들의 행적 찾기에 나섰다. 복지시설, 무인도 등 14만여 곳을 수색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26년이 지난 현재까지 범인의 흔적은 찾지 못했고 2006년 3월 25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주목할 부분은 유족 측에서 ‘경찰이 사건을 은폐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1991년 사건 초기 경찰이 뚜렷한 근거 없이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한 것이라는 일방적인 수사 방향을 결정했다. 경찰은 아이들을 찾는데도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유골이 발견된 장소는 고도 300m에 불과한 야산으로 아이들이 길을 잃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유족 측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시신 발견 당시 경찰은 ‘길 잃은 아이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법의학팀은 유골에 남아 있는 흔적을 근거로 ‘타살로 인한 사망’이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11년이 지나 발견됐다는 점도 경찰에 대한 불신을 짙게 하고 있다. 실종 약 2개월 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모든 수사력을 동원해 실종 어린이를 찾아내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경찰과 군이 대대적으로 투입돼 현장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유족들은 시신이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사건 당시 유골이 발견된 장소에 매장됐다면 못 찾았을 리가 없다는 게 유족 측의 주장이다. 누군가 아이들을 찾게 하려고 사건 이후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우철원군의 아버지는 “애들이 이곳에서 죽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옮긴 것으로 본다”고 밝힌 바 있다.
 
또 경찰은 유골 발굴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오히려 훼손했다는 게 전국미아실종자가족찾기시민의모임(전미찾모)의 주장이다. 유골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곡괭이와 삽으로 현장을 파헤쳐 놓았다는 것이다.
 
유골이 발견되기 하루 전 한 언론사에 “대구 와룡산에 가면 개구리소년 5명의 유골이 묻혀있다. 큰 무덤 같은 흔적을 파보면 5명의 유골이 그대로 다 나올 것”이라는 제보를 한 남성이 있었다는 점도 의혹을 짙게 하고 있다.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사건 진상규명과 추모비 등 추모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박찬인 군의 아버지 박건서(65)씨는 추모식에서 “지난해 말 무릎수술을 해서 추모식 현장까지 찾아오기가 너무나도 버겁다”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술잔 하나 올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모임 회장에 따르면 유족 측은 지난 6월 성서경찰서에 당시 수사 사항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거절당했다. 조만간 유족들과 함께 국회와 청와대를 방문해 진실을 밝혀 줄 것을 호소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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