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 때 서희는 뛰어난 ‘외교술’로 대군을 몰고 쳐들어온 거란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물리친데 이어 강동 6주의 땅까지 얻어내 국토를 넓힌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조정에서는 항복파와 지금의 평양 이북 지역을 넘겨주자는 목소리가 주를 이루었으나 서희는 국서를 받들고 거란의 군영으로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희는 결코 꿀리지 않는 당당한 자세로 소손녕을 굴복시키는 ‘자주외교’를 펼쳤다. 
언뜻 보면 서희의 일방적인 승리로 보이지만 거란 역시 얻은 것이 있었다. 소손녕도 서희로부터 고려가 여진족을 쫓아내면 거란과 교역을 하는 한편 거란의 적대국인 송나라와는 연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서희는 고려와의 국교를 목표로 한 거란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해 소손녕이 양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주면서 회군(回軍)에 땅 요구까지 관철시켰던 것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외교의 달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장수왕은 주변국과의 외교에서 힘을 과시하기보단 조공을 적절히 활용하는 등 ‘왕복 외교(shuttle diplomacy)’와 같은 수법을 썼다. (백제·신라)와 중국이라는 2개의 전선에 끼여 전략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고구려의 안보를 안정적으로 관리했다는 평가다. 
반면 조선시대 인조정권은 국제적 역학 관계를 무시한 채 명분론으로 국제질서에 맞서다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후금의 힘은 광해군 때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커진 상황이었다. 후금이 명을 도모해 명·청 교체의 주인공이 되려고 작심을 했다면 명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조선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인조는 당연 후금과 명이라는 두 강대국의 대결에 끼어있는 상황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와 명나라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배반한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권력교체에 성공한 인조반정 세력은 그 명분론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한계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 같은 비극을 능동적으로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집권세력이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흐름이 크게 바뀔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느 시대 못지않게 엄중하다. 그동안 당해보지 못했던 중국으로부터의 사드 경제보복까지 당하고 있다. 일본은 한반도 긴장 상태를 자국의 군국화의 구실로 삼으려 하고 있다. 1000년 전 ‘거란 침공’ 때는 그나마 주고받을 게 있었고, 장수왕 때는 고구려의 국력이 막강했는 데다 사용할 외교적 카드도 다양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카드는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대한제국(조선)이 망했을 때 외국의 한 계몽가는 냉엄한 국제질서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큰 나라에 사대하며 중심을 잡지 못한 조선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아쉽게도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한·미·일) 대 (북·중·러) 등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구축한 신냉전 구도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데도 중간에 끼인 우리 정부는 미국·중국 눈치만 보고 있는 형편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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