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1965년 협정 시 권익 보장 소홀→반세기 차별로 이어져
고국 지향에서 정주 지향으로… “다문화 공생 사회 희망”

 
201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이 체결된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한일 협정으로 재일동포들은 비로소 법적 지위를 얻게 됐지만 미비한 규정 탓에 아직도 차별에 시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남북 분단에 따른 민단과 총련의 대립에다가 뉴커머와 올드커머의 갈등까지 겪었다. 더욱이 최근 일본에 부는 우경화 바람으로 생존권에 위협마저 느끼는 상황에 처했다.
 
“한일 관계에서 재일동포의 존재는 늘 ‘뒷방 신세’였습니다. 1965년 국교 정상화 때 재일동포들의 권익 보장에 소홀했던 것이 지금까지 차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점차 존재감이 줄어드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송하성 경기대 교수(한국공공정책학회 회장)는 지난 2014년 12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을 맞는 2015년을 ‘재일동포 권익 신장의 해’로 삼아야 한다는 말로 감회를 대신했다. 송 교수는 3억 달러 정도의 대일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양보 여부보다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확보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세미나 개최 등 다양한 학술활동을 펼쳤다. 송 교수의 지적처럼 왜 재일동포는 홀대를 받았을까.
 
재일동포는 식민지 지배의 산물로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1945년에는 210만 명까지 늘었다가 이듬해 3월까지 140만여 명이 귀국하고 60만 명이 남았다. 이들이 현재 재일동포의 원형이다. 전후 일본은 재일동포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1947년 외국인으로 등록시키면서 편의상 ‘조선’(朝鮮) 국적을 표기하게 했다. 이는 실제 국적이 아닌 외국인 등록상 기호였다.
 
1965년 한일 간 국교 수복으로 형식상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가 보장되었다. 당시 협정 가운데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은 그들이 일본 사회와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일본 정부가 협조하도록 명시해 놓았다. 그러나 법적 지위에는 강제퇴거 조항이 있어 늘 재일동포의 발목을 잡았다.
 
송 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가 재일동포를 일본에서 쫓아내려고 이 조항을 신설했다고 설명했다. 이 조항에 따라 재일동포는 외국인 등록증을 상시 휴대하지 않으면 추방됐으며, 외국인 등록 신고를 할 때도 20년간의 거주 기록 작성이 의무화돼 누락이나 잘못이 있으면 영주권 자격을 박탈당했다.
 
송 교수는 “이는 이동이 잦았던 동포의 현실을 무시한 처사였다”고 지적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무국적인 ‘조선적’으로 남아 있던 재일동포를 한국 국적으로 끌어안으려 했지만 이런 까다로운 자격 심사 탓에 5년이 지나도록 한국 국적 등록자는 30만 명을 넘지 못했다.
 
나머지 재일동포는 친북계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 소속과 중립 입장을 고수한 조선적(朝鮮籍·무국적)으로 남으면서 지금까지 동포사회는 쪼개진 채 서로 반목해 왔다. 더욱이 일본은 특별 영주 자격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전 출생자로 한정해 이후 출생한 2세들은 귀화를 하거나 일반 영주자로 남아야 하는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2013년 기준 외교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의 재일동포는 55만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조선적이 4만여 명, 신정주자(新停住者)인 뉴커머가 18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법무성은 1952∼2013년 일본 국적으로 바꾼 재일동포 34만여 명을 포함해 일본 내 한반도 출신 인구를 89만 명으로 추정했다.
 
송하성 교수는 “2차대전 때 일본은 조선 사람을 전쟁과 부역에 강제 동원했고 전쟁이 끝나자 그렇게 열도에 끌려온 재일동포를 외국인 취급하며 일본에서 내몰려고 했다”면서 “지금도 ‘재일(在日)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등 일본 우익이 재일동포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은 전후 재일동포에 대한 배타적 시선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본 우경화로 위협받는 생존권
 
고국이 끌어안아 주지 못하고, 일본 정부가 끊임없이 추방하려는 가운데서도 재일동포들은 끈질기게 버티며 고국의 발전을 견인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경화 때문에 생존권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는 20년 이상 지속한 경기 침체로 말미암은 내부 불만의 외부 표현으로 풀이된다. 과거사 왜곡, 일본 평화헌법 개정 추진, 자위대의 군대 전환 추진,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과 더불어 재일동포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종차별과 공격 성향의 헤이트 스피치를 주도하는 재특회는 2007년 발족 당시 회원이 500여 명에 불과했지만 7년 만에 30배로 몸집을 키웠다. 이들은 도쿄와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등지에서 위협적인 시위를 벌여 재외동포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뉴커머로 자수성가한 한 기업인은 “일본의 혐한 정서와 우익의 위협 등으로 많은 동포가 두려움을 느꼈으며 실제로 사업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면서 “일본에서 오래 살아온 올드커머는 소위 ‘내공’을 지니고 있어 비교적 잘 견뎌냈지만 뉴커머는 ‘한류’ 등에 편승해 사업을 펼쳐온 측면이 있어 먹고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민단 vs 총련, 올드커머 vs 뉴커머,
한국적 vs 귀화자

 
전 세계 175개국에 흩어져 사는 700만 명의 재외동포 가운데 재일동포만큼 역사·정치·국적에 따라 다양하게 나뉜 사례는 없다. 역사적으로는 일제강점기에 건너간 1세대와 후손으로 이뤄진 올드커머(구정주자)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유학, 사업 등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뉴커머로 구분한다.
 
정치적으로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을 구심점으로 하는 한국 국적 재일동포, 북한을 지지하거나 북한 국적을 가진 총련계,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조선적으로 갈라져 있다. 재일동포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존재는 귀화자다.
 
단일민족 지향성이 강한 일본에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은 대부분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꿔야 하는, 이른바 ‘일본으로의 동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귀화자는 늘 숨어 있다. 민단과 총련은 지금까지 대결 구도를 유지해 왔고 올드커머와 뉴커머 간에도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총련계의 몰락과 뉴커머의 인구 증가 등 변화에 맞춰 민단도 이들을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
 
흔들리는 동포사회의 구심점 민단
 
1948년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유일한 재일동포 공인단체로 인정받은 민단은 6·25 전쟁을 겪은 뒤 총련과 반세기 넘게 대립과 반목, 투쟁의 길을 걸으며 한국 정부의 생각을 대변해왔다. 민단은 재일동포의 권익 신장을 위해 지문 날인 철폐 운동을 펼치고 취업 차별 철폐와 민족교육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등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냉전시대 이후 해체 위기에 놓인 총련계 동포, 뉴커머, 귀화자들을 껴안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사단법인 재일상공회의소와 분규를 빚으며 재일동포 대표 단체로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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