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정치자금문제 공론화 시켜 새 정치세력 측면 지원 의혹”“쓰고 남은 총선자금 반환한 인사도 있었다” 15대 총선 비화정치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현대비자금 수수의혹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휘청거리는 것은 당연지사. 지난 2000년 총선을 막후에서 지휘했던 권 전고문이 구속되자 당내 인사들의 술렁거림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덩달아 한나라당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도대체 권 전고문을 구속한 진짜 이유가 뭐냐”며 권 전고문 구속 이후의 후폭풍을 두려워하고 있다. 권노갑 전고문의 구속 때문에 정치권이 떨고 있는 진짜 이유를 들여다봤다.민주당 한 고위 당직자는 지난 2000년 총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권노갑 전고문이 당에 상주하며 총선을 막후에서 진두지휘했다고 말할 정도로 권 전고문이 15대 총선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게 이 인사의 전언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선 문민정부 때 김현철 사조직을 본딴 조직이 활동했다. 일명 ‘마포팀’이라고 불린 팀이 그것이다. ‘마포팀’의 역할은 여론조사를 통해 총선후보를 고르고 또 당락을 예측하는 일이었다. ‘마포팀’의 보고서는 권 전고문에게 보고됐다.”200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지상과제는 원내 1당 확보였다. 원내 1당 확보를 위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갖가지 방안을 동원, 사실상 총선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었다는 게 민주당 고위 당직자의 말이다. ‘마포팀’의 1차 목표도 원내 1당 확보였다. ‘마포팀’에서 무엇보다 신경을 곤두세웠던 부분은 수도권 경합지역. 체계적인 관리가 뒤따르면 당선될 수 있는 지역이 1차 관리대상이었다. 때문에 수도권 지역이라 할지라도 등급에 따라 총선자금 지원액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민주당 고위 당직자의 말이다.

“권노갑 전고문은 수도권 경합지역에 특히 관심을 많이 가졌다. 당락 정도에 따라 A,B,C,D 등급으로 분류, 총선 자금을 차등지급했다. 특히 A등급으로 분류된 지역에 총선자금이 집중됐다. A등급은 수도권과 부산의 경합지역이 많이 포함됐다.”이처럼 권 전고문은 총선에 깊이 개입했다. 권 전고문의 말처럼 “잠시 머무르다 갔다”는 ‘정거장론’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2000년 총선 때 총선자금을 지원하다보면 말못할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권 전고문이 측근에게 털어놓았다는 얘기 한토막. 경합지역으로 분류된 민주당 중진에게 권 전고문이 자금을 지원했는데, 총선이 끝난 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겪게 됐다고 한다. 총선에 출마했지만,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낙선한 이 중진이 권 전고문에게 “총선 때 쓰고 남은 돈”이라며 1억2,000만원을 갖고 왔다는 것이다. 권 전고문 입장에선 아직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겪은 것이다. 당차원의 지원금이든, 아니면 후원그룹으로부터 받은 자금이든 선거가 끝난 뒤 ‘남았다’고 남은 돈을 되돌려주는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중진은 권 전고문에게 총선 때 쓰고 남은 돈을 갖고 왔고, 권 전고문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부터 권 전고문은 주변인사에게 “총선자금이 남았다고 되돌려주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이후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2000년 총선에 참여했던 민주당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권 전고문이 총선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내에선 “권노갑 전고문의 당사무실 불이 꺼지는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권 전고문은 열심히 총선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특히 권 전고문이 관심있게 지원한 그룹이 수도권에 출마한 일부 총선후보들이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 ‘권노갑 리스트’가 나돈다.

이 리스트에 수도권 의원이 집중적으로 포함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민주당 의원들이 포함될 ‘권노갑 리스트’의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초강경 수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정치권 인사가 많다.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제살 갉아먹는 일을 하는 이유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물론 검찰의 수사로 촉발된 일이지만,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어느 정도 속도조절도 가능하지 않았느냐는 말도 나오고 있는 실정.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이 부분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이 당직자는 “현대의 비자금 사건은 정치권의 초미의 관심사였고, 청와대도 그 전모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권노갑씨 구속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데는 뭔가 큰 구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드러낸다. 이 당직자는 이른바 ‘청와대 사정 기획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구상중인 새로운 정치문화와 모종의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에서 출발한다. 여당인 민주당의 부패를 모두 드러내고 더불어 한나라당의 정치자금 문제를 공론화시켜 노 대통령이 구상중인 ‘새로운 정치세력 부상’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청와대에선 “권노갑 전 고문의 구속은 청와대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검찰이 알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 일부 청와대 관계자들은 “지금의 검찰은 예전의 검찰이 아니다. 과거처럼 청와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만큼 검찰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청와대 사정 기획설’이 완전히 꼬리를 감추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일각에선 대북송금과 관련, 인수위 때 현대비자금 문제가 어느 정도 파악된 상태였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고위 당직자도 “인수위 때 현대비자금 문제가 상당 정도 파악됐다는 말이 당내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권 전고문의 구속을 ‘국면전환용’으로 해석하는 정치권 인사도 많다. 굿모닝시티 게이트에 신주류가 상당수 포함됐고, 권 전고문의 구속 직전 국회에서 민주당 함승희 의원이 “정몽헌 회장이 검찰에서 강압적인 수사를 받았다”고 폭로한 점 때문에 나오고 있는 말이다. 이처럼 권 전고문의 구속파장은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다. 자칫 기존 정치인 자체가 공멸을 맞을지도 모를 큰 사안이다. 특히 권 전고문이 법정에서 마음에 담고 있던 ‘리스트’를 전격 공개할 경우, 그 파장이 정치권 전체에 미칠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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