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이 되었지만 국정과제 1호인 ‘적폐청산’ 외에 별다른 미래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여야가 과거사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수렁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어 우려된다. 적폐청산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 여권은 ‘정의의 길’이라며 조자룡의 헌 칼 쓰듯 몰아치고 야권은 ‘정치보복’이라며 이에 맞서고 있어서 ‘적폐청산’은 모든 국정 현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북핵 위기나 경제 이슈 등 다른 국가적 현안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적폐청산 드라이브에 매몰되면서 다시 갈가리 찢기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적폐청산인가. ‘정권교체기 정의 세우기’라는 정당성을 가진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라는 반격을 초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돼 진두지휘하기 때문이다.
 
현 집권세력의 ‘과거사 전쟁’은 일정한 법칙이 있다. 정부 각 부처 TF의 문건 공개(비리 제기) → 여당의 공론화(철저수사 요구) → 검찰의 수사 착수 패턴이다. 실제 청와대·국정원·여당이 공개한 문건은 ‘국정원 댓글’,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공영방송 장악’, ‘총선지원’, ‘국정원비자금 제공’ 등 의혹 수사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정권의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 당연히 수사해야 된다. 그것을 반대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적폐청산의 본질은 과거의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아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 전·전전 정권 사람들을 교도소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눈에 적폐청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복수이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를 궤멸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라고 여겨진다면 적폐청산 작업은 반드시 후폭풍을 맞을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돌며 권력은 유한하다. 정권도 5년을 주기로 바뀐다. 오늘의 현 정권은 내일의 전 정권이다. 차기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현 정권은 적폐청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도, 인생도, 예술도 ‘강약’과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인생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때로는 15km로 때로는 5km로 달려야 할 때가 있다. 이걸 놓치면 삶도 피폐해지고 건강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특히 정치는 그리 녹녹치 않다. 멀리 반추할 것도 없다. 24년 전 취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임기 초에 반짝 인기를 누렸지만, 적폐청산의 원조 격인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미명 하에 전직 대통령들 교도소 보내기에 몰두하다가 역사상 초유의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아 국가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린 잘못된 선례가 있다.

프랑스대혁명 때 사형집행기구였던 기요틴(단두대)을 고안한 의사 출신 기요틴 의원이 기요틴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은 혁명적 상황이 아니다. 지금 촛불에서 발화된 권력을 등에 업고 ‘적폐청산’에 앞장서고 있는 검찰, 국정원을 비롯한 권력기관 인사들은 현 상황이 혁명적 상황인줄 착각하면 후과(後果)를 남기게 될 것이다. 만약 공권력이 폭력으로 둔갑한다면 권력이 교체되는 순간 자신들도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계속되는 적폐청산 논란으로 북핵 이슈, 경제개혁 등 핵심 아젠다가 잘 보이지 않고, 사회적 피로감만 누적되고 있다. 벌써 검사, 변호사, 기업 임원 3명이 수사과정에 목숨을 버렸다. 국가 사회적 비용 감소와 갈등 해소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예측 가능한 시한’을 제시해야 한다. 임기 초반 언제까지라고 가닥을 잡아야 한다. 정권 내내 적폐청산으로 밤낮을 지새울 수는 없는 법이다. 둘째, 미래지향적 국정 비전 및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미래지향적 국정 비전이 8이라면 적폐청산은 2로 가야한다. 지금은 선후(先後)와 주종(主從)이 뒤바뀐 어지러운 형국이다. 셋째, 적폐청산은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분야로 대상을 최소화해야 한다. 적폐청산의 대상은 전·전전 정권 전체가 아니라 낡은 제도와 관행이 되어야 한다.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정치의 본질은 사회 통합이다. 여권이 적폐청산이라는 미명으로 ‘한풀이 정치’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고 주문했다. 이제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 정치보복은 또 다른 정치보복을 낳고 국론 분열을 자초한다. 북한의 핵 도발에 맞서 국론을 결집해야 할 때 그 반대로 나가는 것은 국가에 득이 되지 않는다.

중국 역사서 <국어(國語)>에 나오는 ‘종선여등, 종악여붕(從善如登, 從惡如崩)’이라는 말은 “선을 따르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한순간이다”는 의미다. 인생과 정권의 운명도 비슷하다. 좋아지기는 어려워도 나빠지기는 한 순간이다. 적폐청산에 갇힌 대한민국은 과연 어떠한가.

지금 한반도에는 핵추진 항공모함과 최첨단 전투기 등 미국의 전략무기들이 총출동한 위기 상황이다. 이처럼 초당적 안보협력이 필요한 국가존망지추(國家存亡之秋) 상황에 여야가 사생결단식 대결만 일삼고 있다. 방방곡곡에서 자나 깨나 진흙탕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국가 위기 앞에서 ‘적폐’와 ‘신(新)적폐’라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정쟁을 벌이도록 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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