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나간 ‘저승사자’…‘운명’ 앞에 입 열까

<뉴시스>
‘논두렁 시계’ 사건 진두지휘, 2015년엔 “국정원 개입” 폭로하기도
과거 인터뷰서 “내 팔자고 운명”…“다칠 사람 많다”며 미국行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59)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과거 고 노무현 대통령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이른바 ‘논두렁 시계’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다.
 
이 전 중수부장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를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꾸려진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논두렁 시계 사건에 당시 국정원 등이 부당 개입했는지 재조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해 “지금 밝히면 다칠 사람이 많다”고 언급한 뒤 미묘한 시점에 해외로 나가 그의 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6월 출범한 국정원 개혁위는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을 비롯해 ▲노무현 전 대통령 ‘논두렁 시계’ 등 15개 사건을 선정해 ‘적폐청산’ 작업에 돌입했다. 국정원 개입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사건을 재조사해 과거를 반성하고 조직 쇄신 작업을 단행하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논두렁 시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 전 중수부장 조사는 불가피했다. 그는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수사 당시 검찰 수사를 이끌었던 조직의 수장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른 2015년 이 전 중수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논두렁 시계 사건에 국정원이 개입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 보도 등은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며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 내용으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국정원 TF,
“언론플레이로 망신 주기”

 
논두렁 시계 보도를 국정원이 주도했고 당시 검찰 책임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여권 등에서는 이 전 중수부장 역시 논두렁 시계 보도를 조장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다.
 
논두렁 시계와 관련해 당시 눈여겨봐야 할 보도는 두 건이다. 2009년 4월 22일 KBS 보도와 2009년 5월 13일 SBS 보도다.
 
KBS는 9시 메인뉴스에서 ‘박연차, 노 부부에 명품시계 2개 선물’이라는 단독 보도를 했는데, “지난 2006년 9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노무현 대통령 측에 고가의 명품 시계 2개를 건넸다. 보석이 박혀 있어 개당 가격이 1억 원에 달하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스위스 P사의 명품 시계였다”고 보도했다.

SBS는 저녁뉴스에서 “노 전 대통령은 권 여사가 자기 몰래 시계를 받아 보관하다가 지난해 박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시계 두개를 모두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비싼 시계를 논두렁에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집에 가서 물어보겠다며 노 전 대통령이 답변을 피했다고 검찰은 밝혔다”고 전했다.
 
이 보도에서 노 전 대통령의 고가 시계 수수 의혹과 논두렁 시계 등 ‘논란의 시계’가 처음 등장했다. 주목되는 부분은 보도에 등장하는 표현이 단정적이어서 수사 당사자가 확인해 주지 않고는 이러한 표현을 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검찰이 논두렁 시계 보도와 관련한 ‘언론플레이’와 무관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게다가 당시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현재 ‘정운호 게이트’ 연루돼 실형 선고)은 거의 매일 하루 두 차례 공식 비공식 브리핑을 통해 수사 상황을 알려 검찰에서 민감한 내용을 흘린 것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논두렁 시계 보도 열흘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서거했다.
 
이인규, “국정원 소행,
검찰 책임 없어”

 
국정원 개혁위는 지난달 23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09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중적 행태를 부각하라’는 방침을 승인했고, 한 국정원 간부는 당시 이인규 전 중수부장에게 “고가 시계 수수 건 등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므로 언론에 흘려서 적당히 망신 주는 선에서 활용하라”는 발언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전 중수부장은 이 사건을 조사 중인 국정원 적폐청산 TF 조사관과의 지난 7월 통화에서 “지금 밝히면 다칠 사람들이 많다”며 구체적 언급을 피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지난 8월 다니던 대형 로펌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출국했다. 국정원 개혁위가 논두렁 시계 사건에 검찰이 국정원으로부터 ‘수사 가이드라인’을 받았다고 발표한 것과 맞물리던 시점에 출국해 의심의 여지가 컸다.
 
그는 이와 관련해 지난 7일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해서는 “검찰이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일을 한 사실은 전혀 없다. 검사로서 소임을 다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검찰 재수사가 임박하자 해외 도피를 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일하던 로펌을 그만둔 후 미국으로 출국해 여러 곳을 여행 중”이라며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해 조사 요청이 오면 언제든지 귀국해 조사를 받겠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미국 워싱턴DC 인근의 버지니아주 북동부 도시 페어팩스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네티즌 수사대’로 나선 미국 소재의 한 시민단체가 그를 목격했다고 주장해 알려졌다.
 
북미 지역 한인 교포들의 모임인 ‘북미민주포럼’의 강준화 대표는 최근 TBS 라디오에 출연해 현상금까지 내걸고 이 전 중수부장의 행적을 뒤쫓았다며 “워싱턴 덜레스 공항과 페어팩스의 대형 마트에서 (이 전 중수부장이) 포착됐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당시 이사장과
수차례 ‘설전’ 주고받아

 
이 전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을 변호했던 당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수차례 설전을 주고받았다.
 
문 이사장과 이 전 중수부장의 공방은 문 이사장이 2011년 발간한 ‘문재인의 운명’에서 이 전 중수부장 태도를 지적하면서 시작됐다. 문 이사장은 저서에서 “이인규 중수부장이 대통령을 맞이하고 차를 한 잔 내놓았다. 그는 대단히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고 표현했다.
 
이에 대해 이 전 부장은 2015년 언론 인터뷰에서 “공손한 말투로 어떻게 건방질 수가 있겠느냐”며 “사실은 책에 적힌 대로 공손하게 했지만 수사팀 자체에 대한 반감 탓에 문 대표(당시 새정치민주연합)가 그렇게 느낀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은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 논란을 둘러싸고도 맞부딪쳤다. 발단은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발언에서 시작됐다. 조 전 청장은 서울지방경찰청장이던 2010년 3월 서울경찰청 기동단 팀장을 상대로 강연한 자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뭐 때문에 뛰어내렸습니까. 뛰어내리기 바로 전날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그거 때문에 뛰어내린 겁니다”라고 말해 논란에 휩싸였다.
 
이와 관련 이 전 중수부장은 같은 해 9월 언론 인터뷰에서 차명계좌 존재에 대해 “틀린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니다”라며 “꼭 차명계좌라고 하긴 그렇지만 실제로 이상한 돈의 흐름이 나왔다고 하면 틀린 것도 아니지 않나”라고 밝혔다.
 
당시 문 이사장 등은 조 전 청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는데, 문 이사장은 이 전 중수부장 언론 인터뷰 며칠 뒤 사건의 법률대리인 자격으로 검찰에 출석한 자리에서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의 발언은 가치 없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하며 “차명계좌는 없다”고 말했다.
 
한편, 조현오 청장은 2014년 3월 노 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조 전 청장 상고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계 저승사자’
盧 서거 후 검찰 떠나

 
이 전 중수부장은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경동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왔다. 그는 부인 김민정씨(55)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사법시험 24회(연수원 14기)로 검찰에 입문한 그는 검찰조직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이 강하고 업무추진력과 지휘 통솔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장, 서울중앙지검 3차장, 대검 중수부장 등 검찰 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3년 4월 금융·증권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형사9부를 금융조사부로 전환했을 당시 형사9부장을 맡았고, 기업 수사를 많이 다뤄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2009년 1월 검찰의 핵심 요직인 대검 중수부장에 내정됐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뒤 노 전 대통령 표적수사 논란의 중심에 섰고, 노 전 대통령이 수사 중 서거하자 같은 해 7월 25년간 몸담았던 검찰을 떠났다.
 
그는 퇴임식에서 표적수사 논란에 대해 “수사 중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고 수사팀을 비난하고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며, 중수부 폐지까지 거론되는 것은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다”고 항변한 바 있다.
 
대검 중수부는 청와대나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아 권력형 비리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의 핵심 부서였지만, 표적 수사 논란으로 수차례 ‘정치 검찰’ 오명을 받자 결국 2013년 4월 폐지됐다. 현재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중수부 역할을 하고 있다.
 
박연차 게이트로 노 전 대통령 수사를 주도했던 이 전 중수부장은 퇴임 후 2개월여 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변론을 맡았던 법무법인 바른에 영입돼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2011년 언론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해 “그게 다 내 팔자고 운명이다. 그분 돌아가실 때 했던 말씀처럼 이게 다 운명인 거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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