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91] 88시간 인질극 벌인 ‘김희로 사건’
[그때 그 사건 91] 88시간 인질극 벌인 ‘김희로 사건’
  • 윤광제 작가
  • 입력 2017-11-20 09:37
  • 승인 2017.11.20 09:37
  • 호수 1229
  •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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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조센징’ 폭언을 일삼은 일본 사회에 ‘경종’
재일교포 인권·차별 문제 수면 위로 부상

 
김희로(金禧老·2010년 작고) 사건은 1968년 2월 20일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 청수(淸水)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터졌다.
 
야쿠자는 빌려 쓴 돈을 갚으라며 협박한 뒤 김 씨에게 “조센징, 더러운 돼지새끼”라는 욕설을 퍼부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日本)에서 살아오면서 온갖 차별과 모멸을 받아온 그는 이 한 마디에 피가 왈칵 거꾸로 치솟음을 느꼈다. 그는 갖고 있던 엽총으로 시즈오카 현 야쿠자 두목과 그 부하를 겨누어 사살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다.
 
살해 후 그는 현장에서 45km 떨어진 시즈오카(靜岡)현 스마타쿄(寸又峽)의 후지노미 온천여관으로 달아나 여관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장장 ‘88시간의 인질극’을 벌였다. 그는 이를 재일교포의 차별 문제를 부각하는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다.
 
당시 사건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그의 인질극과 주장이 TV와 신문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됐으며 쉬쉬하던 재일교포의 인권(人權)과 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본격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인질극을 지켜보던 김희로의 어머니 박득숙씨는 아들에게 한복 한벌을 건네준 뒤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며 자신도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사건 나흘째에 기자로 위장한 수사관에 의해 전격 체포됐다.
 
그는 혀를 깨물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 중에는 호소가와 모리히로 전 총리가 아사히 신문 기자 자격으로 사건을 지켜봤다. 그가 95년 방한 때 한일과거사에 대해 진지한 반성의 발언을 한 것도 당시의 경험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체포된 뒤 여관주인에게 손목시계를 풀어주며 여관비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여관주인 모치즈키 씨는 68년 2월 27일로 시간이 멈춘 이 태엽시계를 김 씨가 석방되면 돌려주겠다며 보관했다(이는 99년 1월 삼중 스님에게 전달됨).
 
‘김의 전쟁’으로 일컬어진 김 씨의 31년 수감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8년간의 지리한 법정공방 끝에 75년 11월 무기징역이 확정된 그는 시즈오카 구치소에서 구마모토 형무소로 이감됐다. 김 씨의 수감은 어머니 박 씨에게 피눈물나는 여생을 강요했다. 박 씨는 시즈오카 시립양로원에서 92세로 타계하기까지 평생을 아들의 옥바라지로 보냈다.
 
박 씨는 사망 전 “내가 재혼한 뒤로 희로가 빗나가기 시작했으니 아들의 벌은 내가 받아야 한다”며 눈물로 석방을 호소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일본 현행법상 무기수로 10년이 넘은 모범수는 가석방 대상이 되는 게 상례. 그러나 교도소 표창을 8차례나 받아온 그는 번번이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돼 일본 최장기수 기록을 경신했다.
 
그는 하염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재일교포의 인권 신장에 대한 집념은 버리지 않았다. 출소 후 귀국하자는 어머니의 희망과는 달리 “목숨이 붙은 채 교도소 문을 나서면 일본에 남아 재일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공언하곤 했다는 것이다.
 
일본법무성은 야쿠자 보복과 신원보증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석방을 기피해 왔으나 김 씨의 이같은 집념도 늦은 석방의 이유로 꼽혔다. 김 씨의 사건이 단순 폭력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석방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일었다. 국내에서는 종교인이 중심이 돼 석방 탄원이 줄기차게 이뤄졌다.
 
석방에 가장 앞장선 사람은 박삼중(朴三中·75) 스님. ‘사형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삼중 스님은 교화를 위해 일본을 드나들던 중 그의 절절한 사연을 듣고 발벗고 석방운동에 나섰다. 박 씨의 뜨거운 모성애에 감복한 삼중 스님은 모자 상봉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1970년부터 외롭게 김 씨 석방운동을 펴 온 이재현씨와 함께 1990년에 10만명 서명운동을 벌여 규슈지방갱생보호위원회에 접수시켰으며, 93년에도 1만 3천여명의 서명과 석방요청서를 일본 법무성에 보냈다.
 
이 서명서에는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와 김영삼 민자당 대표도 서명했다. 국내외 여론도 김 씨 석방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 일본의 유력지 아사히 신문은 92년 8월 ‘무대재방(舞臺再訪)-김희로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16회에 걸쳐 연재물을 내보냈고, 일본 후지TV도 ‘김희로의 전쟁’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아사히 신문은 또 99년 초 또다시 김희로 시리즈를 내보내며 김 씨의 석방을 예의 주시해왔다. 국내에서도 92년 1월 김 씨의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김(金)의 전쟁’(김영빈 감독)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으며 KBS TV도 김 씨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집중조명했다.
 
김 씨의 석방이 구체화된 것은 98년부터였다. 삼중 스님은 일본 법무성이 요구하는 신원인수보증서를 구마모토 형무소에 제출한 데 이어 김 씨로부터 고국행 의사를 구두로 받아냈다. 이같은 김씨의 귀국 의사는 이후 석방 절차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 씨는 이어 99년 6월 7일과 7월 16일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에 출옥 후 한국으로 가되 일본을 비방하지 않으며 오로지 삼중 스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제출했고, 이를 검토한 일본 정부가 석방을 최종 결정함으로써 그의 ‘31년 전쟁’이 일단락됐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후 한일관계 호전도 그의 석방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