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6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 성장’으로 진화 거듭
‘경제개발 5개년’ 기반… 1962년 계급별 호봉제 최초 시행

 
우리 군(軍)의 군복, 급식, 급여 등 의(衣)·식(食)·봉급체계는 60여 년간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먼저 군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제복(制服), 즉 지난 60여 년간 국방색이었던 군복은 얼룩무늬로 바뀐 뒤 이제 디지털무늬로 점차 진화하고 있다. 1948년 건군(建軍) 이후 6.25전쟁 때까지는 우리 손으로 제정되고 마련된 군복이 없어 일본군과 미군의 국방색 군복에 한국군의 표지를 달아 활용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던 것이 휴전(休戰)이 되면서 안정된 제복을 착용하려는 노력으로 1954년 복장규칙이 정비되면서 한국군 군복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 원조로 받은 원단을 국내에서 미군 전투복의 디자인을 모방해 가공했기 때문에 기존의 재활용 미군복과 별 차이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베트남전 파병을 계기로 한국군의 군복은 점차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전투력 증강을 위한 전술훈련의 강화와 야전 진지 보강작업 등으로 작업복의 정비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병사에 한해 1965년부터 쉽게 마모되는 부분인 어깨, 팔꿈치, 무릎, 엉덩이 등의 부위에 같은 재질의 천을 덧댄 작업복이 생겼다.
 
그러나 외출복이 따로 없었던 당시 현실에서 품위가 떨어져 보인다는 이유로 1967년 1월 병사 작업복이 종전의 형태로 환원되고 아울러 호칭도 ‘작업복’에서 ‘전투복’으로 바뀌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장교 전투복에 한해 상의에 아랫깃이 없는 ‘오브롱 칼라’를 도입하고 어깨에는 견장대가 부착됐다.
 
1971년에 제작된 군복은 베트남전에서의 경험을 살려 활동에 편리하도록 상의를 밖으로 내어 착용하도록 디자인됐지만 군기가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1973년 새 군복으로 교체됐다. 주머니를 작게 만들고 상의를 하의 안으로 넣어 입는 형태로 제작된 이 군복은 1990년까지 우리 군의 상징이 됐다.
 
국방색 군복이 지금의 얼룩무늬 군복으로 바뀐 것은 1990년 11월. 1970년대부터 기갑부대 등 일부 특수부대에서 착용한 얼룩무늬 군복이 이때부터 전군에 보급됐다. 얼룩무늬 위장색은 한국의 4계절과 삼림, 토양 등 기후와 지형의 특성을 고려해 검은색 20%, 녹색 30%, 갈색 30%, 모래색 20%로 구성됐다.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지역에 파병되는 장병에게는 황토색을 기본으로 하는 사막용 얼룩무늬 전투복이 지급됐다.
 
2006년 공개돼 특전사에 한해 보급된 당시의 군복은 기존 얼룩무늬 형태에서 위장막 형태의 더욱 조밀한 무늬(일명 디지털무늬)였다. 기능성 재질을 사용해 땀 흡수율과 방수 기능이 향상됐고, 신속한 착용과 활동 편의성을 고려해 전투복 상의를 하의 밖으로 내놓고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지난 2007년 레바논 유엔평화유지군(UNIFIL)에 파병된 동명부대 장병도 이 군복을 지급받았다.
 
당시 국방부는 이 군복을 전 군으로 확대 보급했고, 군 연구기관을 통해 2020년을 목표로 주위 환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색상을 바꾸고 자동온도조절장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원거리 통신망을 갖춘 첨단 군복을 개발하고 있다.
 
군수(軍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급식은 창군(創軍) 이래 부대별로 제각각 이뤄지다가 1949년 육군본부에 병식과가 설치된 이후 각 부대에서 균형된 급식이 이뤄졌다. 그러나 초기에는 일부 군 간부들의 부정행위로 당시 1인당 하루 6홉이었던 급식량마저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950년대 육군 수도사단장과 감찰감, 훈련소장 등을 역임했던 한 예비역 대장은 회고록에서“1956년 육군 맹호부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모든 장병에게 6홉의 밥을 급식하게 돼 있었다. 병사들은 한창나이 때라 6홉의 급식으로도 부족한 상태였는데 몰지각한 일부 간부들의 부정행위로 정량 급식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군 급식은 이후 군 자체적인 정화 노력과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차차 개선되면서 제 틀을 갖추게 됐고 1976년부터 1식 3찬 급식이 시행됐으며 그 이듬해에는 메뉴의 다양화를 위해 카레가 급식 메뉴에 포함됐다.
 
1982년부터는 매년 주곡의 혼식 비율이 조정돼 흰쌀 소비율이 점차 증가했으며 1990년대엔 우유나 육류 급식이 크게 늘었고 2000년대에는 삼계탕, 불고기 등과 같은 메뉴뿐만 아니라 후식으로 과일 주스가 편성됐다.
 
국방부는 쌀 외에도 신세대 병사들의 선호에 맞춰 빵, 떡국, 자장면, 냉면, 스파게티, 쫄면, 생우동 등 분식을 급식했다. 군의 봉급체계는 정치, 경제, 사회의 발전 상황과 그 맥(脈)을 같이하며 작전(作戰)이나 근무환경, 인식 등의 변화를 수용하며 변천해 왔다.
 
최초 회계연도인 1948년 4월 1일 기준으로 시행된 계급별 단일 봉급제에 따르면 월(月) 봉급액은 소위가 1만 원, 대장이 3만 원이었다. 당시 백미 1가마(100ℓ)가 1만7천400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결코 높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6.25전쟁과 전후(戰後) 복구시기를 거치는 동안 악성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화폐가치의 급락과 세출·세입의 불균형으로 봉급 정액이 13차례에 걸쳐 바뀌는 등 혼란을 면치 못하다가 1962년 최초로 계급별 호봉제가 시행됐다.
 
공무원 보수 규정에 준용해 지급됐던 군 급여는 1963년 군인보수법 및 시행령 등의 제정으로 안정된 급여체계로 전환됐고 1966∼1970년 5년 동안 봉급이 평균 2∼30%씩 인상했지만 역시 실질 생계비 보장에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1970년대에는 1973년과 1975년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봉급이 15∼45% 인상되면서 상여수당을 비롯한 각종 수당이 신설돼 군 보수 수준이 국민 평균소득 수준보다 높게 유지돼 군 급여체계가 실질적인 생활급여로 향상됐다.
 
1982년에는 공무원 보수제도 통합 운영 방침에 따라 군인보수법 시행령 전문이 폐지됐으나 국민 소득 수준 향상에 맞춘 적정수준의 보수가 보장되도록 1990년대 중반까지 봉급 인상률은 연평균 9%를 유지했다.
 
1997년 IMF사태 이후 1998∼1999년에 걸쳐 봉급이 동결되기도 했지만 2000년부터 최근까지 봉급은 매년 평균 3% 이상 인상됐다. 예비역 육군 대위 출신인 조대원(48·육군사관학교 49기) 지역경제진흥원장은 “군 보수는 군 조직에서 우수한 인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공무원 보수규정으로 해소할 수 없는 군인 업무의 특수성을 적극 반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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