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은 9살의 초등학교 학생 이승복 군이 1968년 12월9일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무참히 참살당한 날이다. 이 날 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화전민 촌의 이승복 군 집에 남한으로 침투한 북한공비 120명 중 5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승복 군에게 “너는 남한이 좋으냐, 북한이 좋으냐?”고 물었다. 이승복 군은 거리낌 없이 “북한은 싫어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답했다. 그들은 이승복 군에게 달려들어 입을 찢고 돌로 내리쳐  죽였다.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도 함께 참혹하게 변을 당했다. 
조선일보는 현장을 취재해 1968년 12월11일자 ‘잔비(殘匪) 일가 4명 참살’ 제하의 기사에서 이 끔찍한 사실을 보도했다. 그로부터 24년 후인 1992년 가을 ‘저널리즘’ 잡지에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고 주장하는 글이 실렸다.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승복 조작 주장은 날개를 달았다. 1998년 가을부터 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미디어오늘, MBC 등은 조선일보의 이승복 기사가 사실 아닌 소설이라고 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서울지법 형사9단독 박태동 부장판사는 이승복의 발언은 사실이라고 판결했다. 조작 주범들은 각기 6월과 10월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대법원도 2006년과 2009년 이승복 기사가 사실이라고 결정했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에는 이승복기념관이 들어섰고 오른손을 높이 쳐들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절규하는 이승복 군의 동상이 세워졌다. 올 49회 이승복 추모식에도 ‘대한민국 육·해·공군·해병대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 회원 60여명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9년째 빠짐없이 참배했다. 
그러나 이승복 기념관을 찾는 방문객들은 날로 줄어든다. 1982년 개관했을 때만 해도 연간 70만 명이나 되었지만, 작년 해 방문객 수는 20만 명에 그쳤다. 이승복이 잊혀져 가고 있다. 하지만 독일의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숨어 살았던 집 방문객 수는 그녀가 죽은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성시를 이룬다. 
안네는 아돌프 히틀러 나치 정권을 피해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네덜란드 암스텔담으로 탈출했다. 이 소녀는 1944년 8월4일 게슈타포(독일 비밀경찰)에 체포돼 독일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압송돼 다음 해 목숨을 잃었다. 안네가 아버지의 큰 가게 다락방에 숨어 지내며 써내려 간 ‘안네 프랑크 일기’는 1947년 발견돼 세계 베스트 셀러로 떠올랐다. 안네가 게슈타포에 발각될 것이 두려워 사람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공포 속에 지내던 일기장은 나치의 잔혹한 ‘유태인 홀로코스트(대학살)’를 고발한다. 안네가 숨어 지내던 집에는 아직도 매년 1백30만 명이 찾는다.  
안네 프랑크의 가엾은 죽음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고발하는 상징이라면, 이승복의 참혹한 죽음은 북한 공산군의 잔혹한 양민학살을 증언한다. 이승복도 안네 프랑크처럼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에 족하다.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지 33년 만인 1991년 소련 공산당 정권은 “공산당이 싫다”는 소련 국민의 함성 속에 붕괴되고 말았다. 공산주의 중국도, 베트남도, 캄보디아도 “공산당이 싫다”며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돌아섰다. 
핏발 서린 북한 공비의 총칼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공산주의가 싫어요”라고 외친 이승복은 대한민국의 반공 귀감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전 세계가 주목해야 할 선각자적 반공 절규였다. 정부는 이승복 기념사업을 단순히 대한민국의 반공 귀감으로만 국한해선 아니 된다. 안네 프랑크 못지않게 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홍보와 지원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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