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연안여객선 노후화 심각…선박 선령 낮춰야
필수 기본규정 준수 위한 시스템 마련 필요

 
“승객들을 구하려고 끝까지 배안에 남아 사투를 벌였던 서헤훼리호 백 선장의 숭고한 죽음이 떠오르네요.”
 
전북 부안군 위도면 주민들은 24년 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당시 배 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백운두(당시 56세) 선장을 ‘진정한 뱃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20분께 부안군 위도면을 떠나 격포항으로 가던 중 침몰, 362명의 승객 중 292명이 숨진 사상 최악의 해상 참사였다.
 
당시 백 선장은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상황에서 홀로 탈출해 인근 섬이나 뭍으로 도주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구조작업에 나섰던 민간인들과 생존자 중 누구도 배에서 백 선장을 보지 못했다는 진술이 나왔고, 사고 후 인근 항구에서 백 선장과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제보까지 이어져 검찰은 그를 지명수배하는 웃지 못할 촌극(寸劇)까지 벌였다.
 
당시 사법당국은 백 선장이 살아있을 확률이 98%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백 선장의 가족은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고통 속에서 죄인처럼 숨죽여야 했다. 그러나 백 선장은 사고 닷새 만에 침몰 선박 2층 조타실 뒤편 통신실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 순간 선장실에 있었던 백 선장은 황급히 조타실 뒤 통신실로 뛰어들었으나 순식간에 휩쓸려 들어온 물살에 출입문이 막혀 탈출하지 못하고 희생됐다. 해경에 ‘구조 요청’을 하려고 통신실로 뛰어든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승객의 안전을 지키고자 그는 숭고한 죽음을 택했다.
 
서해훼리호는 출항 당시 북서풍이 초당 10∼14m, 파고 2∼3m로 해상 기상이 좋지 않았다. 폭풍주의보 등 기상특보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여객선이 출항하기에는 악천후였다. 백 선장은 결국 높은 파도 때문에 운항이 어렵게 되자 무리한 운항보다는 회항을 결정, 선수를 돌리려다 사고와 맞닥뜨렸다.
 
극도의 불안 속에서 무서운 죽음을 직감했을 그였지만 선장으로서 자세와 의무,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부안군 위도면 출신 KBS 방송작가 서주원 씨는 “선장은 승객은 물론 배와 함께 하는 공동운명체”라며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던 백 선장의 숭고한 죽음이 다시 생각난다”고 말했다.
 
서해훼리호 선체 합동조사반은 1993년 11월 내놓은 ‘서해훼리호 전복 침몰사고 조사 보고서’에서 “선박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적·과승에 대한 엄격한 행정지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해훼리호 전복 침몰사고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서해훼리호는 선박 왼쪽 중앙 부분으로 큰 파도가 몰아치자 조타기를 북쪽으로 60도 꺾었고 이후 원래 항로로 복귀하기 위해 조타기를 40도가량 돌리려고 했으나 조작 미숙으로 120도까지 꺾는 바람에 중심을 잃었다.
 
93년 서해훼리호 참사 이후 연안 여객선들에 대한 안전 관리 실태, 얼마나 나아졌을까.
 
부산항 연안여객선 3척은 모두 선령(船齡)이 20년을 넘겼다. 일본 등 외국에서 운항하던 선박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부산과 제주를 오가는 카페리 2척 가운데 서경파라다이스호(6천626t·정원 613명)는 선령이 30년, 서경아일랜드호(5천223t·정원 880명)는 선령이 24년이다. 부산항 연안을 오가는 누리마루호(358t·정원 278명)는 1988년 일본에서 지어져 29년이나 됐다.
 
2014년 4월 해경 등 관련 기관들은 부산항 연안여객선들을 특별 안전점검했다. 사실상 예고된 점검이었는데도 비상훈련, 인명구조장비, 차량과 화물 고정상태 등에서 40가지 문제점이 쏟아졌다. 서경아일랜드호는 16가지 지적을 받았다.
 
일부 선원이 비상상황이 생겼을 때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구명정 하강훈련 때는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다. 구명정 탑승에 필요한 승객용 사다리가 잘 펼쳐지지 않았고 구명정까지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표시가 부실했다. 서경파라다이스호에서도 비슷한 14가지 문제점이 나왔다. 특히 선박 블랙박스인 VDR이 오작동했다.
 
화물을 체인 대신에 밴드로 고정, 한쪽으로 쏠릴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부산 항내를 오가는 누리마루호도 비상상황 때 개인별 임무 숙지 미흡, 비상훈련 매뉴얼 부실, 객실∼비상탈출구 유도표시 미흡, 타기실 천장 누수 같은 문제점 10가지가 드러났다.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국제여객선들도 노후화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산∼일본 4개 항로에 7개 선사가 여객선 13척(카페리 4척, 쾌속선 9척)을 운항하고 있는데 선령이 20년 이상인 선박이 8척(61.5%)이나 된다.
 
2014년 이같은 문제점들이 지적되자 당시 해양수산부는 여러 예방 대책을 내놨다.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 구성, 여객선 승선권 발권 전면 전산화, 여객선 안전운항관리 업무 한국해운조합과 분리, 여객선 정원 늘리는 구조변경 금지, 여객선 블랙박스 탑재 의무화 등이었다.
 
1급 항해사만 대형 여객선 선장을 맡도록 했다. 비행기 조종사처럼 선장도 주기적으로 적성심사를 받게 하고 탈락하면 퇴출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해양전문가와 해운업계 관계자 등은 이런 뒷북 대책보다 기본에 충실한 안전관리 강화와 근본 대책 마련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KBS 서주원 방송작가(전 해양수산부 사이버독도해양청)는 “대형 해양사고를 막는 데 필수적인 기본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처음부터 다시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며 “연안여객선 안전기준을 국제여객선 수준으로 강화하고 영세한 여객선사에 보조금을 주는 등 공공성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하성 경기대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본에서 20년 넘게 운항한 중고 선박을 우리나라 연안여객선으로 도입하는 관행을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 교수는 “일본은 선사가 새 배를 지으면 80% 이상을 공기업에서 대출해 준다. 정부가 연안여객선사 지원에 나선다면 선박 선령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라며 “선사는 스스로 승객 안전관리와 선박 관리, 승객과 화물 체크 등을 강화하고 관련 기관들은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부산의 한 해운전문가는 “연안운송업체가 대부분 영세해 억지로 비용을 줄이려다 보니 노후 선박 도입, 전문성 떨어지는 인력 채용, 선박관리 부실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가 연안운송의 공공성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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