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길수 가족 탈북지원가’ 문국한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
[인터뷰] ‘장길수 가족 탈북지원가’ 문국한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
  • 조택영 기자
  • 입력 2018-01-12 20:22
  • 승인 2018.01.12 20:22
  • 호수 1237
  • 2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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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 주민들이 죽어 가고 있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는 지난 2001년 6월 장길수 가족 탈북을 이끈 행동가다. 그는 지난 1996년부터 굶주림과 공포 정치를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난민 수십 명을 보호하고 직접 구출했다. 그 중 가장 큰 화제가 됐던 사건이 2001년 6월 장길수 가족 중 7명을 베이징 유엔난민기구(UNHCR)에 진입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국제사회에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탈북민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일요서울은 문 대표와 만나 장길수 가족의 탈북 뒷이야기와 탈북민들의 현실을 들어봤다.

“한변 등 북한 인권 단체, 돈이 없다”
“북한 인권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 탈북자, 북한인권 등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 1994년 문구류 사업을 하려고 중국에 갔다. 그때만 하더라도 중국으로 (사업) 진출하는 사람이 적었다. 연필 하나만 팔아도 인구가 10억이 넘어 1원씩만 남아도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동북삼성(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 등)을 다녔는데 연길에서 처음 탈북자를 만났다. 연길에 있는 조선족인 지인이 찾아온 것이다. 북한에서 온 청년이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냐고 내게 제안했다. 당시는 김정일 사망 등으로 북한 사회가 흉흉했다. 탈북자를 만나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어 거절을 했는데 집요하게 만나보라고 종용했다. 그렇게 탈북 청년과 만난 뒤 3년을 같이 지냈다.

그 청년은 북한의 외대(외국어대학)를 다니다가 퇴학을 당했다. 사상성도 없는 홍콩 무협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소지했다가 불심검문에 걸렸기 때문. 퇴학을 당한 시점부터 운명이 바뀌었다. 청년은 몰래 라디오를 듣고 북한사회에서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청년의 부모들은 안타까워했다. 북한에서 한 번 그러면(단속에 걸리면) 인생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들은 할 수 없이 청년을 평양 근처에 플라스틱 그릇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시켰는데 청년은 그곳에서 또다시 충격을 받게 됐다. (공장 사람들과) 대화가 안 됐다는 것(말이 안 통한다)이다. 그들의 의식수준이 원시인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청년은 그 충격으로 연길로 넘어(탈북)왔고 나를 만나게 됐다.

그 청년이 얘기한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평양에 있는 7세짜리 아이도 지방에 가면 당 간부를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만큼 평양과 지방의 빈부격차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사실 확인을 위해 많은 탈북자들과 만나 얘기도 해보고 현장(북한)도 가봤더니 평양을 제외한 지방은 그야말로 원시사회였다. 청년과 3년을 같이 있다 보니 사업은 뒷전이고 이 소식(북한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졌다.
 
▲ 2001년 장길수 가족을 탈북시켰다. 유엔난민기구 건물로의 진입은 누구 생각이었나?
- 장길수 가족은 중국 동북삼성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당시 탈북 브로커가 형성되는 시기였는데 브로커들은 탈북비용으로 한 사람당 300만 원을 요구했다. 지금도 300만 원이 적은 돈이 아닌데 2000년도 초반이니까 굉장히 큰 액수였다. 게다가 15명이면 4500만 원이다. 그때는 몽골 국경을 넘는 탈북 루트(경로)만 존재할 때다. 국경 가는 길에 사막이 있는데 탈북하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많이 죽어나갔다.

안 되겠다 싶어서 베이징에 있는 유엔난민기구에 찾아갔다. 유엔 관리에게 자료들을 보여주며 장길수 가족을 구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유엔 관리는 “중국 정부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동북삼성에 가서 장길수 가족을 만나 실제 처한 상황을 봐 달라고 호소했더니 갈 수 없다고 했다. 이후에도 몇 번을 찾아갔으나 똑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다섯 번째 방문하니 그제야 립 서비스(?)로 유엔본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관심을 100번 가지면 뭐 하겠는가. 탈북자들을 구해 내야지. 유엔난민기구에 또다시 방문했다. 유엔 관리는 할 수없이 장길수 가족 중 한 사람을 대표로 만나보자는 대답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곳(유엔난민기구)에 쳐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그때부터 위기가 시작됐다.
 
▲ “위기가 시작됐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중국 공안이나 북한이 문제였나?
- 나는 장길수 가족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며 한국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권총 한 자루 들려주면 북한에 가서 김정일을 쏴죽이겠다는 얘기를 싱겁게 하던 사람들이 한국에 안 간다고 하는 것이다. 은신처에 숨어있는 내내 라디오를 들은 탓이다. 장길수 가족은 라디오를 통해 1999년 11월 중‧러 국경에서 러시아국경수비대에 체포된 7명의 탈북자 사건을 들었던 거다. 그 사람들은 러시아에서 난민 인정을 받았음에도 중국에 보내졌고 중국은 이들을 곧바로 북송해 버렸다. 그러나 난민 인정도 안 받고 불시에 유엔난민기구에 쳐들어간 터라 장길수 가족이 잔뜩 겁먹은 것이다. 가족 15명 중 장길수만 가겠다고 했다. 한 사람(장길수)이라도 살려보고자 했는데 당시 장길수 가족을 취재하던 일본 기자가 (국제적인) 영향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장길수 군 어머니가 답답하다는 이유로 은신처를 탈출해 잠시 연길을 갔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나는 “지금 위험한 때이니 절대 가지 마라”고 거듭 얘기했다. 그러나 말을 안 듣고 나왔다가 그 사달(북송)이 났다. 그 사건으로 인해 장길수 가족은 내 계획(유엔난민기구 진입)에 동참하기로 작정했다.
 
▲ 장길수 가족들이 유엔난민기구에 들어가던 과정을 설명한다면?
- 한국으로 가겠다는 장길수 가족 10명 중 7명이 내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나머지 3명은 몽골 국경을 넘겠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8명은 여러(우여곡절) 상황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유엔난민기구에 진입하기 전 숙소에서 가족들의 몸 수색을 진행했다. 이들은 가짜 신분증과 무기들을 가지고 있더라. (중국 공안에게) 걸리면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다 뺏었다. 유엔난민기구는 건물 2층에 위치해 있었다. 해당 건물은 복합 건물로 고층은 아파트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파트에 가는 가족, 주민처럼 위장하기로 했다. 잡히는 상황을 대비해서 3무리로 나눴다. 나와 장길수 군, 그의 할머니 무리, 일본 기자 무리, 통역사 무리 등 3무리다. (일전에) 일본 기자에게 “언론은 당신이 책임져라”라고 말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물에 진입하자 큰 위기가 왔다. 현관 유리문이 열리자마자 ENG카메라 기자 등이 내 얼굴을 비춘 것이다. 전혀 작전 시나리오에 없었던 상황이다. 우리가 2층 유엔난민기구에 진입하고 상황(유엔관리와 접선)이 벌어지면 취재하기로 얘기가 됐던 부분인데 큰일 났구나 싶었다. 중국 공안이 기자들을 제지했다. 나는 장길수 군, 그의 외할머니 손을 잡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는데 ENG카메라 기자가 그곳까지 진입했다. 공안은 기자가 못 올라가게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른 뒤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기자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때 공안이 움찔하고 손을 놓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느냐 닫히느냐에 사활이 걸려 있는데 결국 문이 닫히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살았다고 안도했다.
 
▲ 2층으로 올라간 뒤 상황은 어땠나? 장길수 가족은 모두 안전하게 올라갔나?
- 2층 보안(팀)이 내 얼굴을 아니까(자주 방문하니까) 바로 열어 줬다. (일명) 프리패스였다. ENG카메라 기자는 못 들어가게 했다. 들어가서 세미나실에 두 사람(장길수, 외할머니)을 앉혔다. 그리고 유엔난민기구 안내원에게 소장과 (접선) 약속을 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약속이 어디 있는가. 무작정 찾아간 것이지. 두 사람은 살았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사람이 걱정됐다. 그러던 중 기적이 벌어졌다. 1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머지 무리가 올라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ENG카메라 기자와 공안의 실랑이로 조사를 안 받고 무사 통과한 것이다. 알고 보니 소장이 내부에 있었다. 나는 소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여기서 문제가 생길 것에 대비해 이 사람들(장길수 가족)이 쥐약까지 가져왔다”고 말했다. 소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결국 난민 신청 서류를 가져오더라. 이튿날 (여러) 조간(신문)에 1면 톱으로 대서특필됐다. 전 세계적인 톱 뉴스가 된 것이다.

▲ 장길수 가족 탈북 사건 이후 문 대표는 더욱 적극적인 탈북민 구출 활동을 벌여 왔다.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 내가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서 잘못된 정보들이 난무했다. (과거) 어느날 한 주간지에서 내가 속칭 떡고물(돈)을 많이 챙겨 먹었다는 보도를 했다. 난 언론을 잘 상대 안 하지만 그곳은 찾아갔다. 편집장을 만났다. 그 곳에서 편집장에게 “KGB(옛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 돈이라도 먹겠다. (북한 주민) 생명 살리는 데 그걸 보고 깨끗한 돈, 더러운 돈이 어디 있느냐”고 얘기했다. (실제) 난 단 1달러도 받은 일이 없다. 우리 북한 인권 단체 회원들이 모으는 돈도 부족해서 이런 위험한 일(공관 진입 등)을 한 것이다. 난 김대중 정부 때도 목소리를 많이 높였다. (햇볕 정책으로) 북한에 퍼다주는 천분의 일이라도 북한 주민을 구출하는 곳에 쓰라는 취지였다. (탈북민들을 위해) 중국을 공략해야 한다.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이하 한변) 등 여러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탈북민 강제북송 반대) 시위를 했는데 인권 단체가 아무리 성명을 내도 중국 측은 일언반구 대꾸가 없었다. 어느날 한 북한 인권 단체장이 장길수 일가족 중 ‘김한미’라는 여자아이가 북한 인권의 상징적 인물인데 동상을 제작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관련 단체들이 중국대사관 앞에 동상을 세우겠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아니나 다를까 중국에서 압력이 온 것이다. 한변이나 북한 인권 단체들이 돈이 없다. 북한 인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분명 대사관 앞에 동상을 세우면 정부‧서울시 등과 몸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또 중국 정부로부터 굉장한 압력이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 인권 단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탈북민들을 구출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시급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