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99] ‘녹두장군’ 전봉준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 그리고 ‘절명시’
[그때 그 사건 99] ‘녹두장군’ 전봉준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 그리고 ‘절명시’
  • 윤광제 작가
  • 입력 2018-01-15 09:01
  • 승인 2018.01.15 09:01
  • 호수 1237
  •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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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년 전 혼돈의 시기에 보국안민·제폭구민 기치로 분연히 봉기
혈전의 대명사 ‘황토현 전투’, 한국농민혁명사에서 고딕체로 기록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그러나 영웅을 낳지 못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124년 전 외세와 탐관오리가 판을 치는 혼돈의 시기에 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 기치로 분연히 일어선 이가 있으니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다. 그의 주 무대인 전북 정읍시와 전봉준이 부하의 밀고로 붙잡혔던 현장을 어떤 곳일까.
 
전봉준은 1855년 오늘날 고창군 덕정면 죽림리 당촌에서 태어났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1827년생이며 어머니 언양 김씨는 1821년생이다. 당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전봉준은 가세가 기울자 순창, 임실 등을 떠돌다가 서른 살쯤 고부(현재 정읍시)로 들어와 서당을 열고 한약방을 차려 생계를 꾸렸다. 아버지 전창혁은 선비여서 마을 일을 보기도 하고 향교 장의(공립 교육기관의 책임자) 노릇을 했다.
 
당시 고부는 호남에서도 으뜸가는 곡창지대였다. 이런 조건은 탐관오리가 선호하는 곳이 됐고, 실질적으로 가혹한 수탈이 자행됐다. 고부 봉기는 이런 환경적 원인으로 발생했다.
 
1892년 4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지금까지도 탐관오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조병갑은 순조 왕비 조씨 일족으로 그의 아버지는 태인군수를 지낸 조규순이다. 역사학자들은 조병갑이 과거 급제자 명단에 없는 점으로 미뤄 관직에 출사한 것이 아니라 권력 비호를 받아 음직으로 고위직에 오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병갑은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고부 농민에게서 1천여 냥을 빼앗았고 불효·음행·잡기 등의 죄목으로 사람들을 가둔 후 대가를 받고서 풀어 주는 등 불법으로 거둔 돈이 무려 2만여 냥이나 됐다고 한다.
 
조병갑의 탐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멀쩡한 만석보(萬石洑)를 허물고 새로운 보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물세 명목으로 벼 700여 석을 강제로 거둬들였다. 이에 고부 농민들은 진정서를 냈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농민 대표들을 처벌하는 등 학정을 그치지 않았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1893년 6월 감세 탄원에 앞장서 고부 관아를 찾았다가 조병갑에게 붙잡혀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숨졌다. 전창혁이 숨진 뒤 고부 민심은 더욱 들끓었다.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전봉준 등 농민들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1894년 음력 1월 만석보를 때려 부수고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조병갑은 담을 뛰어넘어 도망갔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은 훗날 재판에서 “고부군수가 정액(定額·일정하게 정하여진 액수) 외의 가렴(苛斂·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임)이 수만 냥 인고로 민심이 억울하고 한통스러워 의거가 있었다”고 술회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정읍시 이평면 만석보 터에는 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는 1973년 비를 세워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접전한 최초의 싸움이었던 ‘황토현 전투’는 한국농민혁명사에서 고딕체로 기록되는 피의 역사다. 오늘날 황토현 전투는 혈전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1894년 4월 황토현(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서 전라감영군과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황토현으로 유인해 치열한 전투 끝에 대승을 거뒀다.
 
동학농민혁명은 폐정개혁으로 국정을 바로잡고 왜적과 서양으로부터 자주권을 확립하려는 민중 내부의 농민대변혁운동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조선 왕조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밖으로는 청일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국내 모순과 외세침탈을 거부하면서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이 외국 군대가 들어오는 계기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주에서 삼례로 농민군을 이끌고 진격한 전봉준은 1894년 10월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 조정에 항거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삼례에서 농민군 전체를 모은 뒤 충남 공주를 넘어 한양으로 가서 일본군과 대결을 벌이기로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논산에서 손병희의 군사 2만여 명과 합류한 전봉준은 공주로 진격하기 위해 우금치 고개로 향했다.
 
우금치는 전라도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로 1894년 농민군과 친일관군이 최대 격전을 벌인 곳이다. 우금치란 이름은 고개가 험해서 소를 몰고는 넘을 수 없다는 고개, 즉 우금치(牛禁峙)의 금(禁)자가 금(金)자로 바뀐 것이라고도 하고, 이 고개에 금광맥이 있어 소(牛)만한 금덩어리가 들어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 사이에 벌어진 우금치 전투는 동학혁명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고 농민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전투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처절한 패배를 맛봤다. 무라타 소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농민군을 말 그대로 학살했다.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동학농민군은 훈련도 받은 적 없이 구식 화승총이나 칼, 창으로 대결해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만 2만여 명의 농민군은 500여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우금치 계곡은 쓰러진 농민군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산밑 개천은 여러 날 동안 핏물이 흘렀다고 역사를 기록한다.
 
정부군을 이끌었던 친일파 이두황은 “관군은 뒤를 쫓아 가격하니 1천여 명의 적이 이에 맞아 쓰러지는데 추풍의 낙엽과 같았고 길에 버려진 총과 창, 밭에 널려 있는 시체가 눈에 걸리고 발에 채이다”고 그날의 살육을 기억했다. 이두황은 훗날 명성황후 시해에도 관여한다.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 동학군은 원평과 태인, 해주 등에서 반전을 꾀하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군 희생자 수는 10만 명에서 30만 명 선으로 학계는 추산한다. 연이은 패배에 전봉준은 일단 피신하기로 작정했다. 조선 조정은 전봉준의 목에 현상금 1천 냥과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군수 벼슬을 내걸었다.
 
태인에서 농부의 옷차림을 한 전봉준은 부하 10여 명만 데리고 장성 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 추격대 때문에 한곳에 머무를 수 없던 전봉준은 백양사 부근 암자에 피신했다가 다시 순창군 피노리로 향했다.
 
그가 피노리를 택한 것은 옛 부하 김경천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경천은 전봉준이 고부 접주로 있을 때 집사 일을 보며 전봉준을 도왔던 인물이다. 그러나 심약한 김경천은 돈에 눈이 멀어 전봉준은 밀고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당시 항간에서는 “전봉준이 ‘경천(敬天)’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괘가 나돌았다고 한다. 김경천은 이웃 마을에 사는 선비 한신현에게 전봉준의 거처를 알려줬고 결국 전봉준은 몽둥이에 맞아 체포됐다. 김경천은 세상의 눈총과 보복이 두려워 마을을 떠났으나 한신현은 금천군수가 됐다.
 
당시 한 일본 기자는 “불세출의 영웅 전봉준은 하찮은 부하의 밀고와 무지몽매한 장정들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고 표현했다. 1894년 12월 한양으로 압송된 전봉준은 이듬해 3월 29일 손화중, 김덕명 등과 함께 효수되니 향년 41세였다. 전봉준은 한(恨)이 많은 이승과 이별하기 전 ‘절명시’를 후세에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하늘과 땅도 힘을 합하더니 /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가 없구나 /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비록 처절한 패배로 막을 내렸지만 전봉준의 민중 사상은 이후 의병전쟁과 3·1운동, 4·19혁명, 6월 항쟁 등 도도한 역사의 흐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윤광제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