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야간 전경
[일요서울 | 수원 강의석 기자] 유서 깊은 수원은 정조대왕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수원은 수많은 학자들이 탄생했고, 그 학자들은 부국강병에 기여했다.

지금의 수원은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다양하게 발전되고 있다. 풍부한 먹거리와 눈이 기쁜 볼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의 으뜸 도시로 전 세계로의 도약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고 있는 중이다.

▲ 수원의 어원

수원이란 지명의 유래는 본래 내륙이 아닌 바닷가 갯마을에서 비롯되었다. 2천여년 전의 현 화성군의 서쪽은 대부분 바다였으리라 짐작된다.

화성과 수원은 그 지형이 낮은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래 바닷물로 출렁거렸을 이 지역에 차츰 물이 빠져나가면서 작은 섬들은 산으로, 그리고 깊은 곳은 지금처럼 호수나 웅덩이로 변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그 즈음 온통 물나라(水國)로 보였을 포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마을이 점점 커져서 오늘의 ‘수원’이란 지명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수원시 전경
흔히 수원을 말할 때 그 시발지로서 삼한 시대의 모수국(牟水國)을 떠올리곤 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상(上)에 나오는 마한 50여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 옳다면 모수(牟水)는 화성군 중에서도 바다에 연한 남양면이나 송산면 아니면 서신면 쯤이 되리라 추정할 수 있다.

모수국(牟水國)의 정확한 고유어 발음은 재구할 수 없으나 대체로 물이 많은 곳, 즉 ‘물나라’란 뜻으로 쓰인 것 같다.

모수국(牟水(國)의 국(國)은 지금처럼 국가 개념의 나라가 아니라 부족 국가 시대에 한 부족이 모여 살던 집단 마을을 지칭한 것이다.

수원은 5세기 말엽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시절부터 신라 통일까지 매홀(買忽)이라 불렀는데 통일신라 경덕왕대(757년)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고 다시 고려 때는 수주(水州)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여기서 성(城)이나 군(郡) 또는 홀(忽)과 주(州)는 행정 구분에 따른 지명의 접미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명의 핵심인‘수(水)’와 ‘매(買)’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買)는 발음상 물(水)과 관련된 어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말을 기록할 수 있는 고유문자가 없던 시절,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고유명사를 표기한 차자표기법이다.

한편 매홀(買忽)의 忽은‘홀’로 읽히는 한자지만 표기 당시에는‘골’로 읽혔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매홀(買忽)은 당시‘(매)골’또는 ‘미골’로 발음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원시 전경
▲ 수원시 역사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에는 마한의 54소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었다. 이후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이후 매홀군(買忽郡)으로 개칭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태조 때인 940년 수주군(水州郡)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1413년(태종 13년),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개편되어, 현재의 수원이란 명칭이 확립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正祖)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華山/花山)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있던 수원부 치소와 시가지를 현재의 수원화성으로 옮겨버리고, 그 자리에 현륭원을 조성한 것이다. 그 때문에 역사연구가들이 옛 수원의 연구에 애를 먹고 있다.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송산동 일대) 지역이 바로 옛 수원의 중심지였다. 그 와중인 1789년 광주유수부의 일용면과 송동면을 편입하였다.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시 묵었던 화성행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수원에도 배치시키고, 상업을 발전시켰다.

수원 역시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종2품을 두던 유수부였지만, 수원유수는 정2품으로 한성부판윤과 동급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수원은 쇠퇴하고, 정조가 수원에 베풀던 특권 역시 폐지되었다. 다만 유수부라는 지위는 박탈당하진 않았지만 이마저도 1895년 행정구역 최악의 흑역사 23부제 시행으로 인해 인천부 수원군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수원시 전경
일제강점기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으로 현재의 수원 생활권이 확정되었다. 남쪽의 크고 아름다운 지역을 진위군에 내주고, 남양군의 육지 지역[7]과 안산군 일부, 광주군 일부를 가져왔다. 대충 의왕시와 안산시 서남부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이 시기에 옛 수원군과 남양군 시절에 면들의 통폐합이 이루어져, 남부면·북부면이 수원면으로, 태촌면·장주면이 태장면으로, 안녕면·용복면이 안용면으로, 일용면·형석면이 일형면으로, 음덕리면·둔지곶면·화척지면이 음덕면(해방 이후 남양면으로 개칭, 현 화성시 남양읍) 등으로 통합되었다.

이 중 현재의 수원시 영역은 1914년 당시 수원면(팔달구 매산동, 매교동, 행궁동 일대), 일형면(장안구 전역 및 권선구 구운동, 서둔동, 팔달구 고등동, 화서동 일대), 안용면 일부(권선구 서남부), 태장면 일부(권선구 권선동, 팔달구 동부 및 영통구 일대) 등의 영역에 해당된다. 당시 화성행궁 내의 낙남헌을 수원군청으로 사용했다.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고, 1936년 일형면, 안용면, 태장면의 각 일부를 수원읍에 편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8월 14일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면서 바로 다음날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시’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수원군의 잔여지역이 ‘화성군’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1963년 화성군 태장면, 안용면, 일왕면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시역(市域)이 대폭 확장되었다.

1967년 서울특별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됐으며, 1970년 북수동(행궁동) 후생병원 자리에 있던 화성군청이 오산읍으로 이전되었다.

1983년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 하리를, 1987년에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 호매실리(현 금호동 지역)를 편입하면서 시역을 계속 넓혀 나갔다.

1988년, 구제가 실시되어 장안구와 권선구로 분구되었다. 또한 1993년 장안구와 권선구의 일부를 팔달구로 분구하였다.

1995년 화성군 반월면 입북리, 당수리, 태안읍 영통리, 신리, 망포리 및 용인군 기흥읍 영덕리 일부를 편입하여 현재의 수원시 경계가 확정되었다. 그리고 2003년 팔달구 일부를 영통구로 분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되고, 해방 이후 6.25 전쟁으로 화성마저 총탄과 포격 등으로 심한 피해를 입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화성행궁의 대부분이 복원된 상태이다.
수원시 전경
▲ 수원의 지명유래

조원동은 옛날에 이 동네는 대추나무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추나무골, 대추원 등으로 불리었다. 지금의 동네 이름인 조원동은 바로 이 대추나무골, 대추원 등을 한자로 바꿔 쓴 것이다. 따라서 조원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대추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송죽동은 옛날 이 동네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소나무와 대나무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송죽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목동은 옛날 이 동네에는 배나무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배나무골이라 불리었다. 지금의 동네 이름인 이목동도 이 배나무골을 한자로 쓴 것이다. 따라서 이목동이라는 이름은 배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화동은 과거 영화역이라는 역이 있었다. 그래서 역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영화역이 있었던 동네라고 해서 영화동이라고 부른다.

정자동은 정자1동과 정자2동으로 나누어져 있는 동네다. 정자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이 동네에는 영화정 등의 정자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정자동이라는 이름은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화서문
화서동은 화성의 서문을 화서문이라고 부르는데, 이 화서문이 이 동네에 있다. 그래서 화서문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화서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화서1동과 화서2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연무동은 법정동으로 연무동, 상광교동, 하광교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동네에는 연무대가 있다. 이 곳은 옛날 군사 훈련과 무술 연마를 하던 곳이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연무동이라 하게 된 것이다.

상광교동이란 동네는 광교 위쪽에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윗광교골 또는 상광교리라고 불렀다. 지금은 상광교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광교 위쪽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하광교동은 광교 아래쪽에 있는 동네다. 그래서 옛날부터 하광교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하광교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광교 아래쪽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율천동이란 율전동과 천천동을 합한 동네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율전동에서 ‘율’자를 따오고, 천천동에서 ‘천’자를 따와서 율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율전동은 율천동에 속한 법정동이다. 옛날 이 동네는 밤나무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밤밭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이름인 율전동은 바로 이 밤밭을 한자로 쓴 것이다. 따라서 율전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밤나무 밭이 있는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천천동은 율천동에 속한 법정동이다. 옛날부터 이 동네에는 큰 샘물이 있어서 큰 내를 이루어 서호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래서 샘내 마을 또는 이를 한자로 표현한 천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즉 천천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샘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입북동은 갓뫼 또는 입산이라 부르는 산 뒤쪽(북쪽)에 있는 동네라서 옛날부터 갓뒤 또는 입북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이름을 이어받아 지금은 입북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입북동은 입산 북쪽에 있는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당수동, 이 동네에는 옛날 아가위 나무, 곧 당수가 많았기 때문에 당수라고 불렀다. 지금의 당수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바로 이러한 옛날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따라서 당수동이라는 이름은 아가위 나무, 즉 당수가 많은 동네라는 뜻이 된다.
창룡문
권선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고려 말 한림 학사였던 이고 선생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고 선생은 벼슬을 내놓고 이 동네에 살면서 백성들이 어질고 착하게 살기를 권하였는데, 선생의 높은 인품과 가르침에 많은 백성들이 감화되어 어질고 착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이고 선생이 ‘착하고 선하게 살기를 권한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권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등동은 고려 시대에 이 동네가 고등촌처였다. 고등촌이라 부르다가 고등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이 동네가 팔달산 서쪽 기슭의 높은 지대에 있다고 해서 고등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우만동은 우만1동과 우만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네다. 우만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옛날 이 동네에 최씨와 임씨 등이 소를 많이 키우며 살았기 때문에 우만이 또는 소만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우만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소를 많이 키우던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동의 동네에는 옛날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인 ‘지(池)’ 자를 써서 ‘지곡’이라 불렀다.

지금은 지동이라 부르는데, 이는 지곡이라는 옛날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따라서 지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연못이 있는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매교동 안에는 매교동과 교동 2개 동의 법정동을 두고 있다. 매교동은 조선 시대 정조 대왕이 행차하실 때 지나던 다리였던 매교가 이 동네에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매교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매교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매교라는 다리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교동은 매교동에 속한 법정동이 있다. 이 동네에는 향교가 있다. 그래서 향교가 있는 마을 또는 향교가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교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신안동은 신안동에 속하는 법정동인 신풍동의 ‘신’자와 장안동의 ‘안’자를 한 글자씩 따서 신안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안문
신안동 안에는 북수동, 장안동, 신풍동이란 3개의 법정동이 있다. 북수동은 옛날부터 수원천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숫골이라 했던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이 동네에는 화홍문이 있다. 그런데 이 화홍문을 북수문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북수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이 북수문이 있는 동네라고해서 북수동이라고 부른다.

장안동이란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부르는데, 이 장안문이 이 동네에 있다. 그래서 장안문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장안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풍동은 옛날부터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가 이 동네에 있었다. 그래서 신풍루가 있는 동네라고 해서 신풍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 수원시의 4개구의 생성과 그 유래

장안구는 수원시 북쪽에 위치한 구다. 장안구라는 이름은 화성의 북쪽 대문인 장안문이 이 지역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팔달구는 수원시 중심 지역에 있는 구다. 팔달구라는 이름은 팔달산과 화성 남쪽 문인 팔달문에서 따온 것이다.

권선구는 수원시 서남쪽 지역에 있는 구다. 권선구라는 이름은 고려 말 한림 학사 이고 선생이 벼슬을 내놓고 이 곳에 살면서 백성들에게 어질고 착하게 살기를 권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팔달문
영통구는 수원시 동부쪽에 있는 구다. 영통구는 동네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원래 이 동네의 지형이 염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염통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영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래에 따른다면, 영통구라는 동네 이름은 염통처럼 생긴 동네라는 뜻이다.

또 다른 유래는 이 지역이 신령스러운 기운과 통하는 곳이기 때문에 영통이라 불렀다. 그래서 옛날부터 신령님과 같은 분이 많이 나타났었고, 신령스러운 보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유래에 따른다면, 영통구는 동네 이름은 ‘신령스러운 기운이 흐르는 동네’라는 뜻이다.

수도권 강의석 기자  kasa59@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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