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서문
[일요서울 | 수원 강의석 기자] 수원의 유적지는 정조와 함께 생성되었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성으로 옮기면서 빈번히 수원에 머물렀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정치, 경제, 문화에서 수많은 실학자들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눈부신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했다.

수원화성 축조는 18세기 격동의 시기에 정조의 혁신을 꿈꾼 장소이기도 하다. 이에 수원은 정조의 등장과 함께 동반 성장을 거듭했던 유서 깊고 역사적인 도시인 것이다.
지지대 비
▲ 지지대 고개의 유래

정조 대왕이 수원에서 의왕으로 넘어 가는 고개가 ‘지지대 고개’다. 이 고개의 이름은 원래 미륵 고개였으나 정조의 지극한 효심으로 인해 지지대 고개란 이름이 생겼고 고개 위에는 지지대 비가 세워져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는 당쟁으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사도 세자는 쌀을 담아두는 나무 상자인 뒤주에 갇혀 목마름과 더위, 배고픔에 지쳐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정조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께서 묻힌 수원 화산에 자주 행차했다.

오죽하면 당시 능을 지키며 관리하는 관리인 능참봉이 “어렵게 능참봉 자리 하나 얻으니 임금 행차가 한 달에 스물아홉 번”이라고 한탄을 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정조는 능참배를 마친 후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왜냐 하면 이 고개를 넘어서면 아버지가 묻힌 화산 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효성이 지극했던 임금은 조금이라도 더 수원 땅에 머물러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서 발걸음을 차마 옮기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발걸음이 더디어 행차가 지체되었기 때문에 ‘지지대’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지지대고개 효행공원
▲ 노송 지대

지지대 고개 바로 앞에 있는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옛날 경수 국도였던 도로를 따라 파장동, 정자동, 송죽동 일대 도로변의 약 5km 구간에 오래된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곳을 말한다.

이 곳에 있는 200년 이상 된 소나무들은 정조가 성을 건설하게 만들고 수원 신도시를 가꾸면서, 직접 사들여 심은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나무들이 베어지고 말라버려 옛날과 같이 울창한 소나무들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1973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하고, 남아 있는 소나무들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과 관심으로 옛날의 모습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조선 22대왕 정조는 세계 문화유산 화성을 쌓은 임금님으로서 누구보다도 효심이 깊었다. 그래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으로 자주 행차를 했으며, 묘소 주변의 화산과 수원에 나무를 많이 심도록 친히 하사금을 줬다. 지금의 노송 지대와 융릉과 건릉 주변에 소나무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 송충이가 많이 늘어나 심어 놓은 소나무를 다 갉아 먹어 자꾸 산림이 황폐해졌다. 정조는 백성들에게 상금까지 내려가며 송충이를 잡았으나 워낙 왕성하게 번창을 해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정조는 친히 화산에 오시어 나무에 붙어 있는 송충이를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네가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우리 아버님의 묘소에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나무들을 갉아 먹어서야 되겠느냐!”라고 호통을 치고는, 그 징그러운 송충이를 입에 넣고 씹었다. 순간 소나무에 붙어 있던 송충이들이 일제히 땅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화산에 송충이들이 생겨나지 않았다고 한다.
노송지대
또 옛날에는 어린이들이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었다. 어린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겨내면 그 나무는 죽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사실을 안 정조는 어린이들을 잡아다 벌을 주는 대신 콩을 볶아 헝겊 주머니에 넣은 후 소나무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소나무 껍질 대신 콩 볶은 것을 먹으며 놀아라.”라는 자상한 뜻이었던 것이다.

▲ 용지와 용두암

현재 방화수류정 아래에 용지, 또는 용연이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다. 용지 절벽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화성 시설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미를 지닌 건물로, 이곳 사람들은 일명 용두각이라고 하며 그 자리는 용의 머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용두암이라 불렀다.

옛날 정조 대왕께서 화성을 쌓으면서 방화수류정을 짓기 전 이곳은 수원천이 휘돌아 나가는 제법 깊은 연못이었다. 이곳에는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다리며 천 년 동안 수양을 쌓던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용은 매일 연못으로 놀러 나오는 귀여운 한 소녀를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발이 미끄러져 연못에 빠져 죽을 뻔한 소녀를 아무도 몰래 건져 주기도 했다. 하지만 소녀는 용의 존재를 몰랐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소녀는 아리따운 여인으로 성장하고 용도 하늘로 오를 날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어느덧 용은 소녀, 아니 성숙해진 여인을 짝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용과 여인은 서로 다른 존재라서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여인은 혼인을 앞두게 되어 용은 더욱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방화수류정
용은 하늘을 다스리는 옥황상제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옥황상제는 인간이 되어 여인과 살든지 여인을 잊고 승천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러나 용은 오랜 세월을 기다리면서 하늘에 오르기를 원했다. 용은 하늘로 오르는 길을 선택했다.

드디어 그날이 다가 왔다. 용은 충만한 하늘의 기운을 온몸에 받으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토록 연모했던 여인을 아주 잊을 수는 없었던지 잠시 공중에 멈추어 여인이 사는 집을 바라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순간 여인이 용이 승천하는 하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용은 가슴과 온몸이 굳어지며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천 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굳어진 용의 몸은 용연 옆으로 떨어져 내려 언덕이 되었고 머리 부분은 바위가 되었다.

후에 사람들은 이 바위가 용의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용두암으로 부르게 되었고, 용이 살던 연못은 용지, 또는 용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광교산
▲ 광교산의 미학 절터

광교산의 버스 종점에서 등산길을 따라 오르면 절터 약수터가 나온다. 이곳은 옛날 미학사, 또는 미약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로 마을 주민들은 미약 절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절은 거의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많은 눈이 내리면 산길이 끊어져 오르기가 몹시 어려웠다. 어느 해 겨울, 엄청난 눈이 쏟아져 길이 끊기고 양식마저 바닥이 났다.

이때 어떤 나그네가 눈 속에서 헤매다 초죽음이 되어 절을 찾아 들었다. 그러자 스님은 마지막 남은 식량을 털어 나그네에게 밥을 지어 주었다.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린 나그네는 커다란 학으로 변해 날아가더니 쌀을 물어다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스님들은 무사히 겨울을 넘길 수 있었다.

또 다른 전설은 이곳은 원래 여승들만 모인 절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아름다운 학이 날아온 뒤에 한 여승이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해 옥동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학이 날아 왔다고 해서 '미학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병원 가옥
▲ 이병원 가옥

장안구 파장동 383번지에 있는 이병원씨의 집이다. 이 집은 1888년 3월에 지어진 것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123호로 지정이 되었다.

ㄱ자형으로 생긴 안채와 ㄴ자형으로 생긴 사랑채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의 집이 어떻게 생겼을까를 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곳이다.
수원시 팔달산지 석묘군
팔달산 지석묘군

지석묘는 먼 옛날인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고인돌이라고도 불리는 지석묘가 권선구 교동 산 3-1번지인 팔달산 기슭에 있다.

여기에는 모두 4기의 지석묘가 있는데 이를 팔달산 지석묘군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지석묘군은 경기도 지역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한강 유역의 선사 문화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팔달산 지석묘군은 1991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이 됐다.

수도권 강의석 기자  kasa59@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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