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일요서울 | 권가림 기자] 무의미한 연명(延命) 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첫발을 뗐지만 곳곳에서 준비 부실이 드러나 제도 정착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연명의료 시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는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이날부터 연명의료 중단이나 유보를 원하는 환자나 가족은 의료윤리위원회가 설치된 의료기관에서 담당의사와 전문의 1명의 진단을 받은 후 말기 환자나 임종 과정 환자로 판단될 시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이후 환자의 의사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의학적 판단이 내려지면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투여 등 네 가지 연명의료를 하지 않게 됐다.
 
단 환자나 가족의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계획서를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
 
긴 논쟁을 낳았던 존엄사 문제는 우여곡절 끝에 연명의료결정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낳았지만 혼란은 당분간 불가피해 보인다.
 
병원 98%는 현재 ‘연명의료 중단’ 요건을 못 갖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현 상황에서는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을 원하더라도 이행할 수 있는 병원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환자가 연명의료를 받지 않으려면 연명의료계획서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된 병원에서 사망이 임박했다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
 
실제 복지부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최도자 의원(국민의당)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3일 기준 전국 3324개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 중 59곳에만 윤리위가 설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상급종합병원은 42개 중 23곳(54.8%), 종합병원은 301개 중 30곳(10%), 병원급은 2981개 중 6곳(0.2%)이 윤리위를 법 시행 전에 설치했다.
 
병원급 중에서는 요양병원은 1519곳 중 4곳(0.3%), 요양병원이 아닌 병원은 1462곳 중 2곳(0.1%)으로 규모가 작을수록 설치율이 낮았다.
 
중소병원·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대부분 환자가 연명의료를 받지 않으려면 급히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셈이다.
 
이에 일부 대형병원에서만 존엄사가 가능하고 중소병원·요양병원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개선 필요성이 지적됐다.
 
윤리위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법조·윤리·종교계 인사 2명 이상 포함 5~20명을 위원으로 선임하고 회의를 정기적으로 여는 비용은 의료기관이 자체 부담해야 하는데 중소병원·요양병원은 인력과 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상급종합병원보다 이런 요건을 충족하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다만 현행법상 의료기관이 윤리위를 설치하는 건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다.
 
이 때문에 의료계에선 “당분간 중소병원·요양병원이 ‘존엄사 사각지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윤리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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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 의학윤리 프로그램에서는 “존엄사가 가능해지면 향후 돈과 목숨을 놓고 계산기를 두들기는 또 다른 윤리문제 논란이 대두될 것”이라고 문제로 삼은 바 있다.
 
실제 일각에선 환자 부양가족의 경제적 부담에 따른 우려를 제기한다.
 
가족 간 재산분쟁을 겪거나 치료비가 부족한 저소득층 노인 환자의 경우에는 본인의 삶의 의지와 무관한 가족의 연명치료 거부로 ‘현대판 고려장’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의료산업화의 일환으로 수익을 중시하는 의료시스템이 퍼진다면 병원 측이 경제력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는데 악용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장기매매나 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목적 등 상업적으로 존엄사가 악용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와 존엄사 허용에 내포된 ‘죽음’의 악용 가능성이 심각히 우려된다.
 
이 외에도 현행법상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없는 ‘말기’ 환자와 그렇지 않은 ‘임종기’ 환자를 구분하는 게 혼란스럽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우리나라는 유럽, 일본, 미국 등이 말기와 임종기를 구분하지 않고 있음에도 말기와 임종기를 구분한다.
 
캐나다, 독일, 호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이 ‘Terminal’(말기의)이란 하나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은 임종기, 대만은 말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허대석 서울대 교수는 지난달 29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임종기와 말기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현장에서는 무척 혼란스럽다”며 “대장암 등 암 환자는 말기 진단이 비교적 쉽지만 심부전 등의 만성질환 환자는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면서 사망하기 때문에 말기와 임종기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반면 존엄사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도 있다.
 
권덕철 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차관은 지난달 25일 한 매체를 통해 “한 해 의료기관에서 사망하는 환자가 전체 사망 환자의 75%”라면서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되면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자기 결정이 존중되고 임종기 의료가 집착적 치료에서 돌봄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의료계에서도 일반적인 존엄사에 대해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범사업 기관에 선정된 모 대학병원 A 교수는 지난달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연명의료결정법을 통해 국내에서도 환자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마무리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의료진들도 지난 보라매병원 사태 이후 넓혀진 집착적인 연명의료 지속에 대한 부담감을 덜게 된 것은 사실이다”고 법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존엄사의 긍정적 의미도 인프라와 사회적 인식이 따라주지 못하면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에 복지부는 제도를 시행해나가며 미흡한 점은 적극적으로 보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미라 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장은 지난 4일 “2월 중 개별 의료기관들의 윤리위 설치 현황을 받아 본 후 공용윤리위원회를 지정할 계획이어서 현재까지 활성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지난달 29일부터 윤리위 등록을 받았으나 아직 초기여서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인프라 확충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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