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성 내세운 블라인드 채용 ‘거짓’이었나요?

[일요서울 | 박아름 기자] 잊을 만하면 터지는 채용 비리 사태에 취업준비생(이하 취준생)들은 눈물 마를 날이 없다. 지난해 말 공공기관 채용 비리 사태에 이어 이번에는 ‘믿었던’ 은행권에서 같은 일이 불거진 것. 비리 대상으로 지목된 은행들은 일제히 “사실 무근”이라며 반박하고 나섰지만 취준생들의 분위기는 냉소적이기만 하다. 특히 일각에서는 해당 은행의 업계 퇴출 및 오너 사퇴를 촉구하며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한 반응을 내비치고 있어 당국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믿었던 은행마저” 분노 확산… 업계 퇴출·오너 사퇴 목소리까지
국민·하나·대구·부산·광주은행 “사실 무근” 의혹 부인

 
금감원은 지난달 31일 국민·하나·대구·부산·광주은행 등 5개 시중은행에서 채용 비리 의심 사례 22건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이들 은행이 채용 시 점수 조작을 통해 특정 학교 출신 또는 인맥이 있는 지원자를 합격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국민은행과 KEB하나은행은 소위 ‘금수저 명부’라고 불리는 VIP 명단까지 만들어 특혜 채용을 했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VIP 명단에는 VIP 고객 및 공직자 자녀들이 이름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다. 이 중에서도 국민은행의 VIP 명단에는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의 종손녀까지 포함돼 있어 논란은 더욱 크다.
 
“빽 없어 기회 박탈” 취준생의 맥 빠진 한숨
 
금감원의 이 같은 발표 직후 은행권은 일제히 “사실 무근”이라며 부인했지만 취준생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공공기관에 이어 그에 준하는 금융권에서까지 같은 사태가 발발하니 ‘믿을 만한 곳 없다’는 한탄이 곳곳에서 섞여 나오고 있다.

한때 은행원을 꿈꿨던 취준생 차모(28)씨는 “사실 그 어느 기업보다 공정해야 하는 곳이 금융권 아닌가. 그런데 은행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내 주변에도 소위 ‘빽’으로 은행에 취업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며 “은행원이 되려고 자격증 따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빽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박탈당하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채용 비리에 대한 규제를 더 강화하지 않는다면 뿌리 뽑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비단 차 씨뿐만이 아니다. 이번 은행권 채용 비리 사태에 대해 취준생들의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금감원의 조사 결과 ‘SKY 대학 출신’을 합격시키기 위해 동국대·건국대 등 특정 대학 출신 지원자를 불합격시켰다는 정황이 드러나며 해당 학교 학생들의 원성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4일 오후 건국대 학보사 ‘건대신문’ 온라인판에는 ‘건국대라 죄송합니다’란 제하의 기사가 게재됐다. 하나은행은 2016 신입 행원 공개채용에서 임원 면접이 종료된 후 SKY 및 외국 대학 출신에게 가산점 형태의 높은 점수를 부여, 이 과정에서 합격권이었던 동국대·건국대·가톨릭대·한양대(에리카) 등 학생이 불합격했다고 전해진다.

학내에서도 하나은행 거래 중단 움직임이 포착되는 등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됐다. 건국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하나은행 카드를 두 동강 냈다” “하나은행 다시는 거래 하지 않겠다” 등의 강경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학생들은 SNS 계정을 통해 #건송합니다(‘건국대라 죄송합니다’란 뜻의 줄임말)라는 해쉬태그로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

일각에서는 해당 은행들의 업계 퇴출 및 오너 사퇴까지 촉구하는 실정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KB국민은행 지부는 지난 5일 여의도 본점 앞에서 채용비리 및 임단협 파행 규탄 결의대회를 열고 채용 비리 의혹에 대한 경영진의 책임을 묻고 나섰다. 박홍배 국민은행 노조위원장은 “(노조가 실시한)설문조사에 응답한 4703명 직원 가운데 93%가 ‘채용 비리는 정당하지 않다’고 답했으며,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도 87.7%에 달했다. 90%가 넘는 직원들이 채용 비리를 납득하지 못한다면 고객과 국민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윤 회장은 취준생들에게 사과하고 사퇴하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검찰도 압수수색 돌입 등 수사 박차
 
앞서 2일 하나금융지주 적폐청산 공동투쟁본부도 ‘KEB하나은행 채용 비리 책임자 처벌 및 대국민 사과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김정태 회장과 함영주 행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들은 “가장 심각한 채용 비리를 저지른 곳 중 하나가 KEB하나은행”이라며 “지주 회장과 행장은 국민들에게 석고대죄하고 즉각 사퇴한 뒤 법의 심판을 기다려야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렇다 보니 검찰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검찰은 지난 5일 이들 5개 시중 은행에 대한 채용 비리 수사에 공식 착수했다. 금감원이 자료 제출의 형태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데 따른 것. 이에 검찰은 지난 6일 윤종규 회장 등 KB금융지주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하며 수사의 고삐를 바짝 조였다. 현재 은행권은 일제히 채용 비리 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상황이라 검찰 수사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금융노조의 한 관계자는 “우리은행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시중은행에서 채용 비리 사태가 드러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 인맥·학맥에 따른 부정 채용 실태가 얼마나 만연한지 여실히 나타난 것”이라며 “이번에 검찰이 미진한 수사 전개로 일망타진에 실패할 경우 비난의 화살이 검찰로 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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