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정점에서 약자 유린한 ‘괴물들’

- 문화예술, 종교계 등 각 분야 ‘실세 권력’이라는 공통점
- ‘미투’ 운동에서 한 발 더 나가 제도 마련 요구 봇물

 
이윤택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자신이 겪은 성범죄를 고백하고 그 심각성을 알리는 캠페인인 이른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방송매체 인터뷰를 통해 활시위가 당겨진 지 한 달여. 봇물처럼 터진 ‘미투’ 폭로로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 가해자들의 면면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각 분야의 거장이거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점에서 약자들을 유린한 그들의 민낯은 그동안 외면해 온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안태근
    “치가 떨렸다. 가슴이 조여 오고 피가 발바닥부터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

지난 1월 29일 jtbc 뉴스룸 인터뷰에 출연해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을 고발한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 이 현직 여검사의 폭로는 성범죄 피해를 당하고도 이를 밝히지 못했던 여성들의 고백을 이끌어내며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한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서 검사의 폭로로 법조계를 넘어 문화예술계 등 우리 사회 전반에 숨겨져 있던 성범죄 피해 사실이 하나둘씩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도 쉽게 피해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엄청난 용기를 낸 그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폭로로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 가해자들의 면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최상층의 위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거장으로 인정받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미투’ 폭로의 도화선이 된 서 검사 성추행의 가해자인 안태근 전 검사장은 검찰 내에서 승승장구했던 실세였다. 서울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차장 검사를 거쳐 법무부 검찰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검찰의 ‘메인 스트림’이었던 것.
 
연이은 ‘미투’ 폭로로 초토화된 공연계, ‘패닉’
 
이후 문화예술계로 번진 ‘미투’운동으로 드러난 가해자들에게서 한결같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바로 해당 분야에서는 막강한 ‘파워’를 지닌 실세였다는 점. 그리고 주위에 호위무사처럼 그 권력을 유지하고 휘두를 수 있도록 보위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동안 전형적인 ‘도제 시스템’ 등 폐쇄적인 문화를 보여 왔던 공연계에서 ‘미투’ 폭로가 계속적으로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달수
     현재 공연계에서 폭로된 가해자는 연극연출가로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었던 이윤택 씨를 비롯해 오태석 극단 목화 대표 겸 서울예대 교수, 조증윤 극단 번작이 대표, 김석만 연극연출가, 윤호진 연극연출가와 연극계 출신 배우들인 오달수 씨, 조재현 씨, 조민기 씨, 이명행 씨, 한명구 씨 등이다. 배우 최일화 씨는 스스로 가해자임을 먼저 밝히기도 했다.
 
왜곡된 권력 휘둘러 온 비뚤어진 ‘제왕들’
 
이윤택 씨의 경우 자신이 만든 연희단거리패의 ‘지배자’였다. 그는 밀양연극촌을 세워 일정 기간 합숙하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수차례 성추행과 성폭력을 일삼았다.
 
 
조민기
    연극촌 내에서 그는 ‘왕’이었고 그의 명령은 곧 ‘법’이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공동작업   을 하는 연극계 환경에서 연출가는 모든 전권을 쥔 ‘강자’였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신입 여성단원은 성범죄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연극계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오태석 씨를 비롯해 조증윤 번작이 대표, 윤호진 씨, 김석만 씨 등이 모두 연출가이거나 연출가 출신이었다. 유명배우라는 점도 성범죄 피해자들에게는 크나 큰 권력이었다. 조민기와 한명구 등 배우는 유명세를 앞 세워 성추행을 일삼았다.

아울러 공연계 성범죄 가해자들이 대부분, 공연계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미래와 ‘생사여탈권’을 쥔 교수였다는 사실도 톺아볼 만하다. 수차례 제자들을 성추행했던 오태석 씨(서울예대)를 비롯해 배우 조민기 씨(청주대), 조재현 씨(경성대), 한명구 씨(극동대) 등 많은 공연계 인사가 교수 신분이었다.    

 
고은
    비단 공연계뿐만 아니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며 우리 문단계의 거목으로 알려진 고은 시인 역시 ‘미투’ 폭로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명됐다. 최영미 시인이 그의 시에서 ‘괴물’로 지칭했던 그의 성추행은 문단의 여성시인들을 상대로 상습적으로 자행됐다. 고 시인에 대한 충격적인 성추행 폭로가 연이어 나오면서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그의 작품을 삭제하는 방안까지 논의되는 중이다.
 
공연계와 문단 외에도 현재 ‘미투’ 운동으로 지목된 가해자들로는 인간문화재 하용부 씨, 시사만화가 박재동 씨, 사진작가 배병우 씨와 로타, 영화감독 조근현 씨와 변희석·이병훈 음악감독, 래퍼 던말릭 등 예술계, 연예계로 퍼져있다.
 
하용부 씨는 지난 2001년과 2004년 밀양연극촌에서 여러 여성단원을 성폭행한 바 있고 박재동 씨는 주례를 부탁하러 찾아온 후배 작가를 성추행했다. ‘소나무’ 작가로 명성을 드높인 배병우 작가 역시 과거 파주 작업실과 촬영여행지 등에서 여학생들에게 성적인 발언을 하거나 신체 접촉을 했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흥부’를 만든 조근현 감독과 변희석·이병훈 음악감독 등도 ‘미투’ 폭로로 가해자가 됐다. 조근현 감독의 성추문은 지난해 다른 영상물에 출연할 배우 지망생과 면접 과정에서 벌어졌으며, 배우 지망생 모 씨가 자신의 SNS에 폭로하면서 알려졌다.
 
종교계로 번진 ‘미투’, 제도적 장치 마련 시급
 
‘미투’ 운동은 이제 문화예술계와 법조계를 넘어 종교계로까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인권과 진보적 가치를 보여 온 천주교의 모 신부가 과거 여성 신도를 성폭행하려 했다는 고백이 나온 데 이어 인권운동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늘 앞장섰던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의 성추행 폭로가 이어졌다.
 
여성 신도 성폭행 사제는 지난 2011년 11월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봉사하러 온 자원봉사자를 강제추행하고 성폭행하려 한 수원교구 한만삼 신부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천주교를 대표해 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지난달 28일, “이번 사태로 교회의 사제들에게 큰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며 “사제들의 성범죄에 대한 제보의 사실 여부를 철저히 확인, 교회법과 사회법 규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처럼 현재까지 법조계와 문화예술계를 넘어 학계와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전 방위적으로 폭로되고 있는 성범죄는 전형적인 ‘권력형 성범죄’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가해자들은 모두 사회적 권력을 이용해 피해자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존재로, 자신의 힘을 무기로 힘없는 자들을 괴롭히며 성범죄를 일삼았다는 것.
 
더욱이 가해자를 두둔하고 감싸는 주변 권력들로 인해 피해자들이 쉽게 폭로하기 어렵고 또 피해자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다 해도 이를 개인적인 불만 등으로 몰아 명예훼손으로 매도함으로써 폭로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재생산해 온 것이 현실이었다.
 
이에 따라 지금부터라도 우리 사회 전 분야의 각종 성적 적폐들을 수면 위로 올려 가해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동시에 ‘미투’의 문제의식이 실질적 사회적 규율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라는 최영미 시인의 포효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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