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지난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세계여성의날’ 110주년 행사가 개최됐다. ‘세계여성의날’은 1975년 유엔이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지정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시민 단체들이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지지하고 성폭력 근절을 촉구하는 기념행사와 집회를 함께 열었다. 최근 우리 사회를 쓰나미처럼 휩쓸고 있는 미투 운동은 학교, 공공기관, 기업 등의 문화까지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접촉을 피하자’ 일부 남성 직장인들 극단적인 행동
‘스킨십 합의 계약서’ 성폭력 예방용, 아니면 면피용?


A씨는 공공기관 고위 간부로 재직하면서 부하 여직원을 ‘터치’하는 일이 잦았고 술자리마다 자신의 옆자리에 항상 여직원들을 앉게 해 내부적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간부 공무원 B씨는 술자리에서 성적 발언을 일삼고 산하기관 여직원의 동석을 요구, 해당 기관으로부터 불만을 사기도 했다.

고위 간부 출신으로 산하 공공기관에 근무하던 C씨는 지난해 말 여직원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자리에서 물러났다.

성폭력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일반 직장은 물론 공공기관, 학교 등 모든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들 기업, 기관 등에서는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나고 있다.

여성 기피 현상
‘펜스 룰’ 아시나요?


최근 남성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여성 직장 동료 기피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만약에 생길 수 있는 성폭력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일부 남성 직장인들이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는 이유는 최근의 미투 운동이 그만큼 거세기 때문이다.

많은 남성 직장인들은 미투 운동이 시작되면서 “도대체 뭐가 성추행인 거야?”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살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행여나 나올지 모르는 성희롱 소지가 있는 발언들을 삼가다 보니 말수도 줄일 수밖에 없다.

미투 운동 이후 불고 있는 이른바 직장 내 여성 기피 현상을 ‘펜스 룰(Pence rule)’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직장 내 성폭력 예방 조치로 여성 직원들과의 교류와 접촉을 피하는 현상이다. 

‘펜스 룰’이란 구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아내 외의 여자와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웠다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발언에서 유래한 용어다. 

문제는 ‘펜스 룰’이 성폭력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성폭력의 원인이 되는 남성우월주의, 권위적인 기업문화 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결국 또 다른 여성 차별만 생길 뿐이라는 분석이 많다.

밥 한 끼 회식도 부담
카톡 업무 지시도


최근 기업에서 회식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팀별, 부서별 단합을 위해 갖던 회식자리가 오히려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30대 직장인 D씨는 “이제 여직원에게 밥 한끼 하자는 말도 쉽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아직까지 기업에 술 문화가 남아있는데 자칫 술 한잔 마시다 말이라도 잘못하면 뒷감당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며 “노래방은 더더욱 생각지도 못한다”고 하소연 했다.

20대 직장인 E씨는 “회사에서 여직원들의 눈도 못 마주치겠다”며 “도대체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모르겠다”며 “미투로 인해 사내 분위기가 많이 서먹해졌다”고 토로했다. 그는 “회사에서도 혹시나 사내에 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닌가 노심초사하다 보니 단체 회식 등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다”라며 변화된 사내문화를 설명했다.

50대 대기업 과장 F씨는 카카오톡 등으로 여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린다. 예전 같았으면 직접 부르거나 얼굴을 보고 이야기했겠지만 미투 운동 이후 이런 방식의 업무 지시가 많아졌다. 혹시나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아예 차단하기 위해서다.

일부에서는 연인들 사이 ‘스킨십 합의 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말 그대로 연인 사이에 스킨십의 허용 범위, 횟수 등을 정하는 것으로 성폭력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등장했지만 일각에서는 남성을 위한 면피용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긴장하는 기업들
온·오프라인 교육, 캠페인 중


대기업들은 미투 운동으로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임직원이 수천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에 달해 일률적으로 통제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거나 외부로 알려질 경우 브랜드 이미지 타격은 물론이고 심각한 매출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임직원 교육 확대, 건전한 회식 문화 권장 등을 진행하면서 혹시 모를 사내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예방 조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재계 고위 관계자는 8일 “웬만한 대기업들은 이미 성희롱이나 성폭력 예방과 관련된 엄격한 징계기준 등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이번 미투 운동 파장에서 보듯,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어 미리 조심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이 성폭행에 연루됐다는 소식이 온라인이나 뉴스 등을 통해 삽시간에 퍼지면 기업 및 브랜드 이미지 실추는 물론 불매 운동으로까지 확산되는 분위기라 특히 조심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국내 가구 업계 1위 한샘의 경우, 사내 성폭력 사건이 온라인상에서 알려지면서 불매운동이 확산하고 홈쇼핑에서는 퇴출당한 바 있다.  

재계 맏형인 삼성전자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매년 1회 이상 성 관련 온·오프라인 교육을 임직원을 대상으로 진행 중이다. 사내 성희롱 예방교육과 오후 9시를 넘기지 않는 회식 문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내 인트라넷과 별도의 애플리케이션으로 성희롱·음주사고 등을 제보할 수 있는 창구도 마련해 운영해 왔다. 제보 내용은 비공개로 처리되며 사실 관계가 확인될 경우 무관용 원칙에 따라 조치하고 있다.

SK그룹도 모든 임직원을 대상으로 1년에 2회에 걸쳐 온오프라인 방식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온라인 교육은 임직원들의 필수 이수 항목이기도 하다. 

LG그룹은 성희롱, 성추행 등 성추문을 ‘LG 윤리규범’위반행위로 규정, 진상조사와 징계위원회 개최 등에 따라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계열사별로 관련 전담조직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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