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탈락의 가벼움

현대와 삼성은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기업이다. 특히 스포츠 외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현대가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했다면 삼성은 이미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 동력을 키워내는 데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현대는 웃었고 삼성은 울고 있다. 현대는 월드컵만으로 6조원의 기업이미지 가치 창출 효과를 봤다면 삼성은 평창 동계올림픽 두 번의 도전 끝에 쓰디쓴 실패를 맛봐야 했다. 현대와 삼성 두 기업 간의 자존심 대결로 평가되고 있는 스포츠 유치 전쟁. 올림픽부터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두 라이벌 그룹이 총수의 이름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스포츠 외교를 통해 감춰진 내막과 비화를 살펴본다.


기업의 스포츠 외교 1세대가 고 정주영, 조중훈 회장과 김우중, 최원석 회장이라면 2세대는 정몽준, 이건희, 박용성, 정몽구 회장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1세대는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성공의 팡파르를 울렸지만 2세대는 평창 동계올림픽의 좌절로 고전하는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올림픽과 월드컵의 성공 유치를 통해 세계 속에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올림픽이 미 대륙에 코리아라는 브랜드를 알렸다면 월드컵을 통해서 유럽에 국가의 신인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 같은 국제대회의 유치 배경에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아낌없는 투자와 노력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현대와 삼성 두 기업은 우리나라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기여한 바가 컸다.

특히 고 정주영 회장과 정몽준 회장, 현대 그룹의 두 부자 유치활동은 올림픽과 월드컵 유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 정주영 회장은 대한체육회 회장과 전경련 회장이라는 명분으로 1981년 5월 정부로부터 올림픽 유치달성이라는 대업을 지시받게 된다.


일본 누른 정주영 꽃다발

자의든 타의든 그는 본격적인 유치활동을 한다. 정 회장은 “나는 봉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지만 대한체육회 회장으로서 2년 3개월의 재임기간 동안 약 40억원의 사재를 투자했을 정도로 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올림픽 유치를 위해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서울, 중동, 동남아 할 것 없이 챙겨야 할 회사 일을 전화로 끝내고 어김없이 올림픽 유치 전략 회의를 했다.

아침 회의를 끝내고 나서면 하루 종일 IOC 위원들이 있는 곳이라면 숙소든 별장이든 식당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뛰어다니다가 밤 11시나 돼야 숙소로 돌아왔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전해지고 있다.

정 회장은 올림픽 유치에 대해서도 ‘이 땅에 태어나서’라는 자서전을 통해 “88올림픽 유치과정동안 IOC 위원들을 만나기 위해 고무줄로 묶은 명함 뭉치를 들고 가히 거지들처럼 회의장 밖을 종일 지키고 섰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보다 한 발 앞 선 일본의 유치 마케팅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일본은 IOC위원 부부들에게 최고급 손목시계를 선물했지만 정 회장은 개최지 투표가 있는 당일 방으로 꽃바구니를 넣어준 것이다.

발표 당일 아침 정 회장은 스타가 돼 있었다. IOC위원 부부들에게 일방적인 감사와 환영의 인사를 받았던 것이다.

돈보다는 발로 뛰고 가슴으로 실천한 정주영의 뛰어난 감성전략이 통했다. 결국 정 회장은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고 국제적인 규모의 행사를 우리 손으로 유치했다는 국민의 자긍심은 하늘을 찔렀다.

2002년 대한민국을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였던 월드컵 유치도 정몽준 회장의 고군분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나라에 올림픽 유치를 빼앗긴 일본이 그해 1988년 3월 월드컵 유치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6년 뒤에서야 비로소 월드컵 유치에 가담했다. 경제력과 외교력뿐만 아니라 아벨란제 FIFA 국제 축구 협회 회장과 FIFA 국제 축구 협회 사무총장이었던 블래터까지 모두가 절대적인 일본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이를 이용했다. FIFA내 반 아벨란제 파들의 지지를 얻어간 것이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 일대일 또는 직접 방문 해 설득을 통한 우의를 다졌다. 결과 EUFA 유럽 축구 협회 회장인 요한손과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 위원들이 한국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의 남북공동개최와 일본의 J리그의 열풍이라는 두 가지 명분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치열한 유치경쟁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과열 양상이 우려가 된 FC 아시아 축구 연맹 피터 벨라판 사무총장이 공동개최를 제안했다.

결국 일본과 우리나라는 이 같은 협회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공동개최에 합의하게 된다.

돈보다는 감성과 마음을 움직여 성공했던 현대가의 불도저식 추진력이 올림픽과 월드컵 앞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됐다.

그러나 삼성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두 번이나 실패했다. 최고, 일등, 일류 주의인 삼성에서 있을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이다.

현대는 올림픽과 월드컵 유치라는 커다란 대업을 달성했지만 삼성은 뚜렷이 유치했던 대회가 없어 자존심이 상했던 터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5대양 6대주를 다녔다.


휠체어로 총회장 찾은 이건희 회장

2005년 싱가포르 IOC총회 때는 다리를 다친 와중에 휠체어를 타고 총회장을 찾았다.

1월에는 신라호텔에서 열린 평창유치 지원 회합에 참석했고, 2월 IOC실사단의 방문시 실사단 영접에도 직접 나섰다.

이 회장은 실사단 방문에 앞서 보광 피닉스파크에서 직접 스키를 타며 인프라와 관련 시설을 점검하기도 했다. 지난 4월 베이징에서 열린 삼성의 올림픽 후원 조인식에도 참석해 자크로게 IOC위원장을 비롯한 33명의 IOC위원들을 만났다.

한달여 간 유럽을 다녔고 과테말라 IOC총회에 앞서 한 달여간 남미를 순회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영어 프리젠테이션이었다.

과테말라 현지에서 마지막으로 단상에 올라 영어 연설을 통해 ‘이것(동계올림픽 유치)이 아마 제 생애의 가장 큰 도전’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동계올림픽 유치에 애착이 컸다.

그러나 평창은 최악의 평창시나리오를 안겨 주었다. 이 회장은 얼마 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했습니다. 대국(러시아) 하고 경쟁해서 4표 차이라면 하나
도 부끄럽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삼성은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너무나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삼성의 끝나지 않은 도전기는 계속될 것이다.

현대와 삼성. 국민적 기대와 성원을 받고 있는 한 스포츠 마케팅은 지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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