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108] 정치권·대기업의 반대에도 1993년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
[그때 그 사건 108] 정치권·대기업의 반대에도 1993년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
  • 윤광제 작가
  • 입력 2018-03-19 10:57
  • 승인 2018.03.19 10:57
  • 호수 1246
  •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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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권’ 발동으로 검은 돈 흐름 원천 차단
송하성 경기대 교수 “실명제는 훌륭한 결단…아쉬움도 남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實名)으로만 이루어집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김영삼(金泳三) 당시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을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개혁 중의 개혁’ 금융실명제가 지지부진한 논란과 두 차례 좌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전격 실시되는 순간이었다.
 
지하경제 키운 비실명 거래
 
정부는 과거 지하경제를 일부 법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 1961년 제정된 ‘예금·적금 등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은 국민저축을 늘리기 위해 비실명 거래를 허용하는 것으로, 과세당국은 무기명 예금 등 소득 발생을 포착하기 어려웠고 거액의 사채자금은 세무조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82년 5공화국 시절 ‘장영자·이철희 부부 어음 사기 사건’이 나라를 뒤흔들자 금융실명제를 1983년 전면 실시한다는 방침 아래 1982년 9월 금융실명제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이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날 실명제를 시행하겠다며 기존 방침을 바꿨다.
 
노태우 대통령도 1988년 취임 후 1989년 4월 금융실명제 실시단(단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구성, 1990년 4월까지 1년간 실명제 준비작업을 벌였으나 역시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준비단을 해체했다. 금융실명제법은 사실상 좌초됐다. 운명의 장난처럼, 금융실명제를 미뤘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1995년 금융실명제의 망에 걸려 법(法)의 심판을 받았다.
 
1993년, 극비리에
금융실명제 제반 작업 착수

 
표류하던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추진에 급물살을 탔다. 각종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 발생으로 실명제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확산된 것이 뒷받침됐다. 1993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은 이경식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금융실명제 추진방안을 은밀하게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금융시장 혼란과 자금 빼돌리기 등을 우려해 실무진은 재무부 고위관료들마저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보안을 지키며 ‘007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극비리 추진에 나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양수길 당시 부총리 자문관과 남상우 박사, 김준일 박사(전 한국은행 부총재보) 등 KDI 작업팀 3명은 실명제 추진 기본계획을 만들어 부총리와 토론하며 이를 다듬었다.
 
홍재형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실무 작업 지시를 받은 김용진 세제실장(전 과학기술처 장관)과 김진표 세제심의관, 임지순 소득세 과장(전 국세청 국세공무원교육원장), 백운찬 사무관(전 관세청장) 등은 서울 강남구 휘문고 앞의 한 건물을 임대해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진동수 재무부 과장(전 금융위원장), 최규연 사무관(전 저축은행중앙회장)도 당시 비밀 작업팀에서 금융 분야를 맡아 실무를 함께했다.
 
실무 총책이었던 김 세제실장은 청와대 경제수석과도 접촉하지 않고 오로지 대통령과 부총리, 재무부 장관과 ‘직통 보고 라인’을 유지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홍 장관은 실무진이 지내던 건물에 드나들 때 신분이 노출될까 봐 티셔츠 차림으로 변장을 하기도 했다.
 
실무진은 동료 직원들의 의심을 피하려고 ‘가짜 해외출장’을 떠난 척했으며, 김 세제실장은 이들의 가족에게 국제전화를 가장해 안부전화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실무진은 업무 효율성을 위해 정부 과천청사와 가까운 아파트를 임대했다.
 
이들은 베란다에 나가는 것까지 금지당해 ‘창살 없는 감옥’ 신세를 졌으며 백 사무관이 직접 나가 사오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이들은 최종안을 만든 뒤에도 인쇄 과정에서 내용이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심초사했다.
 
발표 일주일 전 한 일간지에 ‘금융실명제 실시할 듯’이라는 내용의 추측 기사가 보도돼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지만 보안은 끝까지 지켜졌다. 대통령 담화문이 발표될 때까지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사실을 알았던 것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마침내 시행된 금융실명제…
예상보다 혼란 적어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전격 발동했다. 그 내용은 ▲비실명계좌의 실명확인 없는 인출을 금지 ▲순인출 3천만 원 이상의 경우 국세청에 통보하며, 자금 출처를 조사할 수 있음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해 위 사항을 실시하고, 13일은 오후 2시부터 금융 기관의 업무를 시작한다는 것이 주요 뼈대였다.
 
우려됐던 단기적 부작용은 크지 않았다. 예고 없는 전격 실시로 대규모 자금이탈 등 금융 혼란도 미미했다. 고소득층은 재산규모 노출 등에 거부감을 표시했지만 금융실명거래는 관행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실명전환 의무기간이었던 그해 8월 13일부터 10월 12일 사이 가명계좌의 실명전환율은 97.4%에 달했다. 실명으로 전환된 가명과 차명예금액은 모두 6조2천379억 원이었다. 이후 금융실명제 보완론이 꾸준히 대두됐다.
 
특히 1996년께 대기업 등의 도산이 이어지며 경제난이 심화되자 ‘금융실명제 완화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1997년 말 김영삼 정부는 장기채권과 외평채를 무기명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는 ‘보완조치’를 시행했다. 이는 금융실명제 취지를 퇴색시켰다는 비판과 함께 비자금 조성 등 악용의 불씨를 남겼다.
 
경제기획원 출신으로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을 지낸 송하성 경기대 교수(한국공공정책학회 회장)는 “금융실명제는 나쁜 관행을 끊는 계기가 된 훌륭한 정치적 결단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실 과장(서기관)으로 근무해 실명제와의 인연이 매우 깊다.
 
특히 송 교수는 “금융실명제를 제일 싫어하는 쪽은 정치권과 대기업이었다”며 “2002년 대선 당시에 (정치자금 조성과 관련해) ‘차떼기’가 문제됐다. 재벌들의 경우도 상속·증여 과정, 비자금 축적 과정에서 실명제법 위반이 여러 가지 나왔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금융실명제가 새 관행 정착에 기여했지만 긴급명령으로 시행돼 선의의 불편이나 부작용도 있었다”면서 “정책적으로 접근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고 말했다.

윤광제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