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월남파병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국군을 월남에 파병해야 한다”는 찬성론이 대세를 이뤘다.월남전 당시 우리나라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 부대와 전투부대인 맹호와 청룡, 백마부대를 파병했다. 사진은 월남파병 기념공원.월남전에서 무려 5천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한국군의 월남파병 특히 전투부대의 파병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모든 전쟁은 쌍방간에 피해를 낳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참전의 대가로서 경제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월남파병을 결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을 마감하는 요즘 이라크 파병문제에 직면해 있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후세를 향해 부단히 교훈을 준다. 월남파병의 의의와 그 전말은 어떠한가. 1954년 7월의 제네바 정전협정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중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하노이측은 공산화를 위해 발벗고 나섰으며 고 딘 디엠을 실력자로 한 사이공측은 독재체제를 구축하며 분단을 고착화하는 형상을 보였다. 메콩강 델타 일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콩 세력은 반정부세력과 공동전선을 펴고 남북 월남의 통일을 위해 사력을 다했으며, 고 딘 디엠은 비밀경찰을 강화하고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을 강력히 탄압하는 한편 족벌정치로 통치의 기반을 굳혀 나갔다.베트콩측은 끈질긴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민심을 끌어들이다가 1960년 12월 20일에는 반정부세력을 규합하여 ‘월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여 전국 각처에서 반정부전쟁을 벌였다.

한편 월남 안에서도 1963년 11월 1일 군부 쿠데타로 고 딘 디엠이 실각할 때까지 쿠데타가 3차례나 일어나는 등 정국이 극도로 불안했다. 민족주의와 민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베트콩이 월남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검토하면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반격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월남의 공산화를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1964년 5월 9일 한국을 포함한 자유우방 25개국에 대하여 월남을 적극 지원하도록 호소했다. 그리하여 영국, 서독, 뉴질랜드, 호주, 말레이시아, 태국, 한국 등 14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월남에 파병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요청을 받고 일대 단안을 내린다. 그는 1965년 1월 26일 월남파병에 즈음한 대통령 담화문을 발표하여 파병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역설했다. 곧 이어 정부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목숨을 걸고 수호하기 위해서는 국군을 월남에 파병하여야 한다”는 찬성론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국군을 미국의 용병으로서 낯선 땅에 파견하여 개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다”는 반대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됐다. 이 무렵 정치 및 군사 전문가들은 월남에 파병해야 하는 이유를 크게 두가지 관점에서 분석했다.

먼저 표면적 이유는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우방국들에 대한 보답 △월남의 공산화는 동남아시아 전역의 공산화를 초래하여 세계평화를 위협할 것이므로 집단안전보장에 따른 도의적인 책임의 완수 △한미 공동방위조약의 쌍무협정 정신의 이행 등이다. 다음으로 내면적인 이유는 △주한미군 2개 사단을 월남전에 투입할 경우 사실상 주한미군의 감축으로 북한의 남침이 우려되는 점 △ 파병을 하지 않을 경우 미국의 군사원조 중단 가능성으로 한국군만으로 안보 유지가 불가능한 점 △ 참전할 경우 국군 장비의 현대화 보장 △ 실전 경험으로 효율적인 국토방위와 안정 유지 가능 △국내 기업체의 진출과 군수품 등 국산품 조달로 수출입국의 입지 강화 기회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막대한 자금조달의 필요성(결국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 획득으로 귀결됐음) 등이다. 국회는 이 문제를 놓고 찬반 격론을 벌였다. 대체로 여당은 찬성하고 야당은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젊은 국회의원으로서 촉망을 받았던 김대중 의원은 국회에서 파병에 찬성하는 유명한 연설을 하여 명분과 현실감각이 뛰어난 정치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월남 파병을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로부터 ‘사꾸라’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의원은 국내외 정세를 투시하고 파병의 당위성을 설파한 용기있는 정치인이었다. 결국 국회는 1964년 제44회 본회의에서 이동 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병동의안을 가결한 데 이어 1965년 1월 28일 제47회 본회의에서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을, 1965년 8월 13일 제52회 본회의에서 전투부대인 맹호와 청룡부대의 파병을, 1966년 3월 20일 제55회 본회의에서 전투부대인 백마부대의 파병 등을 가결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비전투부대인 제1이동외과병원과 비둘기부대의 월남파병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 사령부 창설과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십자성부대, 백구부대, 은마부대 등 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하는 등 1964년 7월 18일부터 파리평화협정에 따른 정전과 월남의 공산화 조짐으로 1973년 3월 23일 철수할 때까지 8년 8개월에 걸쳐 연인원 31만 2천 8백 53명이 참전했다.

1965년 10월 12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전투부대의 해외파병을 기록한 맹호사단의 환송식이 열린 여의도비행장은 장도에 오르는 국군을 격려하는 국민의 뜨거운 마음으로 달아올랐다. 주월 한국군사령부의 초대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유엔군이 보유하고 있던 작전지휘권을 넘겨받아 독자적인 작전을 집행할 수 있었다. 그는 베트남 양민과 베트콩을 분리하여 베트콩을 섬멸한다는 이른바 ‘차단·섬멸’전략을 수립하여 베트콩에 결정타를 가했으며, 한국 기업의 월남 진출을 돕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월남에서의 한국군의 용맹은 베트콩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반면 한국군에 대한 적개심을 크게 불러 일으켜 보복의 과녁이 되기도 했다. 이 기간 중 한국군은 적 사살 4만 1천 4백 62명, 적군 포로 4천 6백 33명, 귀순 유도 2천 4백 83명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사망 5천 77명(전사 4천 5백 97명, 순직 2백 77명, 기타 사망 2백 93명), 부상 1만 9백 62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역사는 40년 후에 또다시 우리 민족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이제 이라크 파병문제를 놓고 결론을 내야 한다. 물론 월남전과 이라크전은 여러모로 다르다. 한국군이 파병될 때 월남전은 한참 진행중이었으며 한국군이 파병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라크전은 이미 끝난 상태에서 질서의 회복을 돕는 마무리 과정에 들어서 있다. 전자는 유엔군의 기치를 걸었으나 후자는 다국적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전자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전쟁이었으나 후자는 알 카에다를 비롯한 과격한 테러 분자들과 후세인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군통수권자들의 자세와 관련하여 전자는 존슨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숙고했지만 빠른 시일 안에 파병을 결정하고 처음에는 찬반양론으로 갈라졌던 여론이 곧 박대통령의 결단을 뒷받침했으나 후자는 부시 대통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뚜렷한 원칙을 제시하지 않은 사이에 국론이 찢어지고 있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2003년의 대한민국은 집권 세력 내부에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책임지는 국방부와 국가의 안전에 관한 기획을 수립하고 업무를 조정하는 국가안보회의(NSC)가 전투병 파병문제를 놓고 상반된 견해를 표출하는 등 갈등의 심각성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6·25전쟁에 참전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자유는 피로써 지켜진다”는 신념에 따라 고뇌에 찬 결단을 했지만 전쟁 기간 중 13만명의 미군 사망자를 낸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아들을 보냈다가 전사한 슬픔을 안은 부모가 아들을 위해 국가가 수여한 무공훈장을 반납하자 그것을 집무실 책상 서랍 속에 임기가 끝날 때까지 보관했다는 일화가 있다.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전복하고 독재정치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했지만 국가안보를 다지고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명예를 걸고 죽음을 각오하고 월남으로 떠나는 용사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자꾸만 목이 멘 일이 있다. 우리 국민은 참전의 경험이 없는 이른바 386세대들을 기반으로 하여 등장한 참여정부의 깃발 아래서 2003년 하반기 내내 이라크 파병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이라크 파병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전투병 포함 여부를 놓고 주저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용안, 그리고 설왕설래를 계속하는 우리들의 거동에서 역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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