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주의 형제 분쟁


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의 2세들이 벌이는 주식소유권 분쟁이 결국 대법원까지 가게됐다. 장남인 정몽국(53)씨가 동생인 정몽원(51) 한라건설 회장을 상대로 “한라시멘트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에 명의신탁한 주식을 돌려달라”고 낸 주식인도 청구소송에서 서울고등법원이 1심을 뒤엎고 원고 패소 판결한 것이다. 이로써 정주영 명예회장의 첫 째 동생인 정인영 명예회장의 두 아들이 벌이는 재산분쟁도 결국 ‘왕자의 난’으로 되어버린 모양새다. 정주영 회장의 아들들이 벌인 ‘왕자의 난’에 이은 ‘제2의 왕자의 난’인 셈이다. 최종판결은 대법원에서 가려지게 됐으나 어느 쪽이 이겨도 두 형제사이의 ‘섭섭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엎치락 뒤치락 ‘형제의 난’

두 형제간의 갈등은 지난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형인 몽국씨는 89년부터 한라그룹의 부회장으로 활동해왔으며 몽원씨는 92년 뒤늦게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차남인 몽원씨의 경영능력을 인정해 94년 말 그를 후계자로 정식 지명했다. 몽원씨가 후계자가 됨에 따라 자연스레 입지가 좁아진 몽국씨는 95년 초부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몽원씨는 97년 1월에 정식으로 회장 자리에 올랐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장남인 형을 제쳐두고 차남인 몽원씨에게 경영권을 물려줬으나 몽국씨가 별다른 반발없이 물러서는 바람에 외부에는 별 갈등없이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동안 재계에서는 ‘장자의 낙향’이 불화를 불러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불씨가 남았던 셈이다.
당시 재계 일각에서는 두 형제들의 경영스타일이 달라 형제간 마찰이 있었으며 몽원씨의 회장 취임 후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서먹해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잠잠한 것처럼 보였던 형제간의 갈등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것은 한라그룹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뤄진 구조조정. 외환위기 당시 정몽원 회장은 취임 1년이 되기도 전이었으며 이미 닥치기 시작한 그룹 내의 위기를 수습하기에는 늦은 시점이어서 외환위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사실 한라그룹은 96년까지만해도 자산 6조 2,000억원, 매출 5조 3,000억원의 재계서열 12위의 그룹이었다. 그러나 계열사간 상호 출자와 지급 보증 등으로 인해 자금 위기를 겪다가 외환위기를 맞은 것. 이에 정몽원 회장은 대부분의 계열사를 매각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98년에는 RH시멘트를 설립, 대출받은 4,000억원으로 한라시멘트 자산 등을 사들인 뒤 세계적 시멘트사인 라파즈에 RH시멘트 지분 70%를 매각해 대출금을 갚고 30%는 본인 지분으로 남겨뒀다. 이 과정에서 몽원씨는 형 몽국씨가 가지고 있던 2만 5,740주(3.86%)도 함께 팔았다.
이에 몽국씨가 지난 2003년 “동생인 정몽원 회장이 그룹구조조정과정에서 본인(몽국)이 가지고 있던 한라콘크리트 주식을 임의대로 이전해 버렸다”며 동생을 사문서 위조 및 행사혐의로 고소했고 동시에 주식반환 청구소송도 냈다.
당시 몽국씨는 이에 대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창업자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순히 그룹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동생으로 인해 겪고 있는 재산상의 피해는 견딜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해 소송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은 지난해 3월 “정황상으로 몽국씨가 주식의 관리 처분권을 부친인 정인영 명예회장에 위임했고, 정몽원 회장은 정 명예회장의 지시에 따라 형 몽국씨 소유의 주식을 처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문서 위조 부분에 대해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즉 법원이 몽원씨가 형의 주식을 처분한 것이 몽원씨 스스로의 판단이라기 보다는 정인영 명예회장의 ‘심중(心中)’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2라운드로 접어든 형제간 분쟁
한동안 잠잠했던 형제간의 분쟁이 작년 11월에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몽국 씨가 낸 주식반환 청구소송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김재복 부장판사)가 “피고는 원고에게 라파즈 한라시멘트 주식 390만여주, 한라건설 주식 22만여주를 인도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한라시멘트 주주였던 원고가 이 회사의 구조조정 때문에 피고 명의로 주식을 신탁했고 이번 소송을 통해 신탁관계의 해지를 원하고 있는 점이 사실로 인정되므로 피고는 원고가 당초 소유했던 주식비율 만큼을 돌려줄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고무된 몽국씨는 한달여 뒤인 12월 13일 “주식반환청구 소송에서 승소판결을 받음에 따라 회사가 발행한 정몽원씨 명의의 보통주식 1,356만여주 중 정몽국 전부회장의 몫 총450여만주를 돌려달라”는 주식배당 등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낸 것.
그러나 지난달 29일 서울고등법원이 내린 판결에서 법원은 1심 때와 달리 2심에서는 동생 몽원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회사 구조조정을 통해 이익을 취득한 자가 있을 경우 이익을 누구에게, 어느 범위까지 반환해야 하는지에 대한 법률적 근거가 없어 반환 상대를 특정할 수 없는데다 귀속대상자에 대한 일반적 합의나 입법적 결단도 없는 상태이므로 원고(몽국)의 주장은 이유없다”고 판시했다. 즉, 몽원씨가 처분한 몽국씨의 주식이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고 판단된 상태에서 몽국씨에게 주식을 돌려줄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는 설명이다.

‘주식소유권 분쟁’ 결국 대법원까지
현재 주식소유권을 둘러싼 형제간의 다툼은 1심과 2심의 판결이 엇갈리면서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기다려야 할 상황이 됐다. 게다가 지난 7월 20일 정인영 명예회장이 별세한 것도 이번 분쟁의 변수가 될 수도 있다. 창업주인 아버지가 생존할 때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던 다툼이 이후에는 전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라그룹 측은 이번 소송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꺼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보실 관계자는 “이번 소송과 관련해서 그룹 차원의 대응은 없다”며 “정확한 상황도 모른다”고 답했다. 또한 “이번 소송이 한라건설의 경영권과는 무관한 문제”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라그룹은 범 현대가에 속했던 기업이었다. 고 정인영 명예회장이 바로 ‘왕회장’ 고 정주영 회장의 첫째 동생이었다.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일어났던 ‘왕자의 난’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범 현대가가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끝맺음을 할지 다시 한 번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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