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자율 경영에서 위기 경영으로 체계가 바뀐다. 자율경영 시스템으로 운영하던 삼성그룹은 최근 이 회장이 직접 계열사 현황을 파악하는 등 위기 경영 시스템을 가동했다. 환율 하락, 경기 침체, 반기업 정서 등이 삼성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지난 3월부터 계열사 사장단을 순차적으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승지원(삼성영빈관)으로 불러 사업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이 회장이 경영현안을 직접 챙기는 것은 지난해 7월 베트남에서 ‘동남아전략회의’를 가진 후 9개월여 만이다.

이 회장이 경영일선에 직접 나선 것을 계기로 그룹 전체가 위기경영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주력 계열사별 위기의식도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삼성그룹은 계열사 간 사업이 점검되면서 일부 기업 간 합병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화학제품을 생산해 내는 삼성석유화학(허태학 대표)과 삼성비피(BP)화학(안복현 대표)이 대표적 케이스. 삼성의 위기경영및 합병과 관련한 시나리오를 점검해 본다.

위기경영 시스템 가동

“악화되고 있는 외부 경영 환경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영 시스템을 갖추고 이를 기반으로 제2의 도약을 준비하라.”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과의 만남을 통해 ‘위기경영’을 탈피하기 위한 전략을 밝혔다. 이 회장의 위기경영 선언이후 주력 계열사별로 위기 경영 시스템이 마련되고 있다. 수익성이 낮은 사업에 대해 점검하고 사업방향을 수정하는 등 분주한 모습이다. 또한 유사 사업과 연계 사업의 합병도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삼성석유화학과 삼성비피화학의 합병설이 증권가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삼성석유화학은 합성섬유 원료인 고순도 테레프탈산(PTA)을 생산하고 있으며, 삼성비피(BP)화학은 PTA 원료인 빙초산 및 초산, 수소 등을 제조 판매하고 있다.

비상장기업인 삼성석유화학과 삼성비피(BP)는 대주주가 삼성과 영국BP사이다. 삼성석유화학은 삼성과 영국 BP사가 각각 47.4%의 지분을 갖고 있고 삼성비피화학은 영국 BP사 51%, 삼성 49%로 삼성과 영국BP사가 이들 두 회사의 대주주이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주주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합병 등 다양한 형태의 조합이 가능하다. 제품의 호환 및 연계성이 높아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특히 고유가 등으로 석유화학업계가 어려운 상황이다. 특화된 제품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합병 등으로 몸집을 키워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규모의 경제 실현 ‘노림수’

삼성석유화학과 삼성비피(BP)는 매출규모가 4,400억, 1조2,000억원이다. 두 회사는 합병 등을 통해 몸집 키우기가 절실하다. 생산되는 제품은 다르지만 합병할 경우 제품의 일관성 유지 등이 가능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성석유화학의 주력제품인 PTA는 삼성비피화학의 빙초산이 주원료다. 따라서 이들 두 회사가 합병할 경우 제품 일관성 확보는 물론 품질향상 등도 기대할 수 있다.두 회사를 둘러싼 경영환경은 아주 어려운 편. 유가가 배럴당 70달러(WTI 기준)를 넘어서면 공장가동을 해도 적자가 난다. 중동 석유업체들이 건설 중인 석유화학 공장들이 중국 시장에 값싼 제품을 쏟아내고 있는 점도 문제이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오는 2008년쯤 세계 석유화학 업계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유화업체들의 체질개선이 필요하다.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IMF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비상경영 선포에 ‘촉각’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두 회사 간의 합병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두 회사가 합병을 통해 몸집을 키워야만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측은 공식적으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와 관련, 삼성측의 한 관계자는 “두 회사의 합병은 시기상조”라며 “그동안 그룹 내에서 두 회사에 대한 합병 등을 검토했다. 합병보다는 독립법인 형태로 기업을 유지하면서 성장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삼성석유화학은 지난 74년 자본금 198억원으로 설립돼 1조2,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삼성비피화학은 지난 88년 자본금 600억원으로 문을 연 뒤 지난해 4,4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특히 삼성석유화학은 ‘합병설’을 경계하고 있다.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은 독자 생존을 위한 방안으로 비상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장 경영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허 사장은 지난 2월에 이어 최근에도 서산사업장과 울산사업장을 찾아 유가 급등과 환율 하락 등 불리한 경영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비상경영을 직원들에게 강조했다.삼성의 한 관계자는 “경기회복이 예상보다 더딘 상황에서 경영 외적 요인에다 지방선거 등 기업경영의 불안요인이 가중되는 상황”이라며 “위기경영 시스템을 한층 더 강화하지 않고서는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석유화학은 허태학 사장의 지시아래 3차 산업 마인드로 2차산업을 영입한다는 ‘3·2웨이’를 서비스 브랜드로 도입했다.

삼성비피화학도 독자 경영을 토대로 비상 경영을 실시하고 있다. 삼성BP화학은 고부가가치 정밀화학 제품인 초산과 VAM(비닐아세테이트보너머)를 생산공급하고 있다. 여기에 첨단시스템을 도입해 설비의 안전과 효율 향상을 통해 원가 경쟁력을 높이는데 노력하고 있다. 특히 공정과 설비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혁신 활동과 과학적 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합병설에 휘말린 두 회사의 독자경영을 위한 비상경영 선포에도 불구하고 증권가를 중심으로 합병설은 끊이지 않고 있다.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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