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변하고 있다.삼성그룹은 지난 3월 8일 구조조정본부(이하 구조본)를 ‘전략기획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기존 143명의 인원을 99명으로 대폭 감원하는 구조개편을 단행했다.삼성의 이 같은 변화는 지난 2월 7일 ‘대국민 선언’을 지키기 위한 수순의 일환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삼성의 변화에 대해 시민단체들과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사실 말만 구조개편이라는 것이다. 새로 신설된 전략기획팀이 과거 구조조정본부에서 명칭이 바뀌고 인원만 조정됐을 뿐 ‘권력의 핵심’으로 건재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성그룹의 구조개편은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 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듣고 있다.



몸 낮추기 동작에 불과

재계는 삼성그룹의 구조본 개편은 상징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2월 7일 ‘대국민 선언’을 지키기 위한 수순으로 무엇보다 여론을 감안한 ‘몸 낮추기’ 동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구조본은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 건물 26층에 위치해 있으며, ‘삼성공화국의 청와대’, ‘총수 친위부대’, ‘삼성CEO의 산실’ 등으로 불려 왔다. 한마디로 삼성그룹 내에 있는 ‘또 하나의 권력’이었던 셈이다. 구조본은 경영, 재무, 인사, 홍보, 감사 등 그룹 내 대부분의 업무를 총괄하는 ‘싱크탱크’역할을 하고 있고, 불법정치자금 전달,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 과정 등에도 깊숙이 개입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구조조정본부는 외환위기 이후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조직.

지난 98년 국민의 정부는 재벌간 빅딜을 주선하면서 황제경영의 폐해로 지목되던 회장비서실 폐지를 적극 주문했다. 정부의 요구에 따라 대부분 그룹들은 2~3년 동안 한시적으로 그룹 구조조정을 위해 비서실을 구조조정본부로 대체했다. 이후 삼성을 빼고 대부분 그룹들에서 구조조정본부가 자취를 감추었다.그러나 삼성그룹은 구조본이 건재하면서 불법정치자금과 편법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각종 불법, 탈법적인 행위를 해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실제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과 ‘X-파일’,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에 대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배정 등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 사건에는 구조본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됐었다.특히 구조조정본부 산하 법무실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BW) 증여세 부과소송과 공정거래법 일부 조항에 대한 위헌소송 등을 주도해 ‘국가권력에 맞서는 삼성’이라는 이미지를 심었을 뿐 아니라 ‘삼성 공화국’의 빌미를 사실상 제공했다는 지적을 받았다.이 때문에 삼성이 국민여론을 수렴하기로 약속한 이상 ‘삼성 공화국’의 상징인 구조본에 어떤 식으로든 ‘메스’를 대서 시민단체와 국민들의 비판을 해소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수사로부터 이건희 회장을 보호하고 X파일 특검 논의를 무력화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의혹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본의 순기능인 ‘싱크탱크’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분석된다.현행 구조본은 1실(법무실) 5팀(재무ㆍ경영진단ㆍ기획ㆍ홍보ㆍ인력)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략기획실은 전략지원ㆍ기획홍보ㆍ인사지원 등 3팀 체제로 통폐합한 데서 잘 나타난다. 인력도 147명에서 99명으로 감축된다.전략기획실은 기존 구조본이 수행했던 계열사와 재무, 기획업무에 대한 관리 감독기능을 없애고, 삼성 브랜드 가치제고와 신규 사업 발굴 등 미래 핵심전략 업무만 맡게 된다. 삼성은 이와 함께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해 사실상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 역할을 해온 ‘삼성기업구조조정위원회’를 ‘삼성전략기획위원회’로 개편키로 했다.이 위원회는 구조본 시절의 계열사 관리에서 탈피, 미래 중장기 전략을 협의하는 기구로 바뀌게 된다. 삼성전략기획실 이학수 부회장이 위원장에 임명됐고 위원으로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순택 삼성SDI 사장 ▲이수창 삼성화재 사장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 ▲김진완 삼성중공업 사장 등 주요 계열사 사장 9명이 포진했다.또한 이학수 부회장을 사령탑으로 하는 삼성전략기획실은 전략지원팀장에 김인주 사장, 기획홍보팀장(부사장)에 이순동 부사장, 인사지원팀장에 노인식 부사장 등이 임명됐다.이번 개편을 통해 이학수 부회장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학수 부회장은 전략기획실과 전략지원팀의 사령탑을 맡으면서 이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해온 막강한 위상에 변함이 없음을 과시하고 있다.

문패만 바꿔 단 모양새

삼성그룹의 비서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단골 메뉴였다. 그동안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로 이름만 바꿔왔을 뿐 뼈대는 바뀌지 않았다. 규모와 기능, 어떤 면에서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삼성의 구조 개편을 통해 외적으론 구조본의 해체를 통해 여론을 잠재우고, 내적으론 그룹내 중심을 더욱 공고히 하는 조직적으로 구성하고 있다.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기업 경영에 있어 중복투자 방지 등 선택과 집중을 컨트롤할 수 있는 조직은 어느 기업에도 필요하다. 이것은 경영의 기본이다”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이번 구조본 개편 방향에 경영 투명성과 책임성 등 핵심부분이 빠져 있고 총수 직속 구조본의 핵심 역할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 구조본이 개편된 게 아니라 명칭만 바뀐 ‘눈가리고 아옹식’ 구조개편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공정거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구조본의 현행법상 제재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다. 전략기획실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룹차원에서 부당내부거래에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처벌은 각 계열사가 떠안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04년 5월 구조본의 활동과 경비조달, 사용내역 등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고 재경부 등에서 법제화에 난색을 표시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공정거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구조본의 경영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구조개편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은 “의미 있는 새로운 변화이다. 삼성이 진정한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구조본 축소 등의 지배구조 개선 방안은 ‘삼성의 변화를 예고’했다는 점에서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나, 여전히 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또한 그는 “구조본의 본질은 막강한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학수 부회장이나 김인주 사장이 계열사의 인사와 재무에 직접 간여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일이 없다”면서 “이름만 바꾸고, 일부 팀만 조정하는 구조본의 개편은 큰 의미가 없다. 구조본이 법적 책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인 개혁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한편 정부는 삼성의 구조본 폐지 등 개혁조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삼성이 구조본 기능과 조직을 축소키로 한 것은 바람직한 결정”이라며 “삼성이 정부의 방침을 받아들여 계열사의 자율경영체제를 강화키로 한 것은 의미있는 결정”이라고 말했다.

법무실 수요회 산하이관 ‘눈길’

이번 개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법무실이 구조본에서 아예 떨어져 나와 계열사의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사장단협의회(수요회)’ 산하로 이관된 점. 법무실은 앞으로 이건희 회장과 일가의 상속 문제 등 오너에 대한 업무보다는 계열사의 법률 자문을 하는데 주력하게 된다.대검 수사기획관 출신 이종왕 변호사가 주축이 된 법무실은 기존 삼성 관련 소송을 맡아오던 검찰청 검사들을 대거 영입해 화제가 됐었다. 특히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상무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를 위한 전략과 관련 각종 소송을 맡으면서 ‘뉴파워집단’으로 급부상했다.법무실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증여에 대한 ‘유죄’판결’에 이어 이건희 회장 등 이사 9명에 대한 소액주주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잇단 ‘패소’ 판결을 받으면서 위상이 급격히 추락했다.

이번 법무실이 퇴출된 결정적 배경에 대해 재계에선 “각종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다. 이번 조직 개편안은 구조본 인사팀 내 극소수가 작업을 해 이학수 부회장 등 고위층의 검토를 거쳐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구조본이 전략기획실로 축소 개편된 것만으로 반삼성 여론이 쉽게 희석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름이 바뀌고 조직이 작아진다고 해서 근본 성격이 달라지겠느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그러나 삼성이 ‘삼성식 경영의 상징’으로 인식돼온 구조본에 칼을 들이댄 것 자체로 ‘큰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 삼성 구조본은 어떤 곳그룹내 ‘최강 파워 집단’


구조본이 개편된 전략기획팀은 과거 비서실에서 출발한 그룹의 ‘싱크탱크’와 같은 조직이다. 그동안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옛 비서실 시절보다 계열사의 경쟁력을 더욱 높이는 역할을 해왔다.과거 구조본은 경영, 재무, 인사, 홍보, 감사 등 그룹 내 대부분의 업무를 총괄하며 정치자금 전달, 경영권 승계 과정 등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이것이 이번 전략기획실로 변화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구조본의 전신은 삼성그룹 비서실. 지난 1959년 5월 고 이병철 창업주는 그룹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계열사의 일을 모두 챙기기가 어려워지면서 관리조직이 필요해서 삼성물산 안에 ‘비서과’를 만들었다.

비서실이 제 모습을 갖춘 것은 60년대 후반 감사팀을 발족하면서부터. 이후 비서실은 급속도로 성장한다. 지난 78년부터 90년까지 최장기 비서실장을 맡은 사람은 고 소병해. 당시 비서실은 15개팀에 250여명의 인력을 거느리며 소실장은 이병철 시대의 2인자였다.지난 87년 이건희 회장이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르면서 비서실 조직을 축소해 나갔다. 그러다가 지난 98년 4월 비서실이 해체되고 현재의 구조조정본부로 재탄생하게 된다.구조조정본부가 출범한 후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총대를 메고 구조조정에 착수한다. 구조본이 중심이 돼 유통, 방위산업, 건설, 기계, 자동차 등의 사업을 해외에 매각하면서 59개의 계열사를 45개로 줄이고 5만명이 넘는 직원을 퇴직시켰다. 구조본 상위의 의사결정은 구조조정위원회에서 이루어진다.

위원장인 이학수 본부장과 김인주 사장, 삼성전자의 윤종용 부회장, 이윤우 부회장 등 11명의 멤버가 2주에 한번 꼴로 회의를 개최해 신규사업 진출과 투자, 사업조정, 구조조정 전략 등을 논의한다. 논의 내용은 이건희 회장의 최종 승인을 받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구조본의 파워가 커지면서 세간의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불법 정치자금 등으로 당국의 수사를 받기도 했고, 정부에 정면 대응하면서 ‘삼성공화국’론에 불을 지폈고 결국 이러한 부담이 구조본 개편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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