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 선거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높다. 초등학교에서도 기립대신 무기명 투표를 통해 반장을 뽑는 선거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무역을 대표하는 무역협회장 선거에서 어처구니 없는 기립 표결로 선거가 치러져 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 회장선거를 통해 무역협회는 코엑스몰 등에 대한 분양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 김재철 전임 회장이 물러나는 대신, 그 자리에 청와대의 낙하산 인사를 회장에 앉혔다는 의혹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낙하산 인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 한국무역협회 신임 회장에 이희범 전산자부장관이 선임됐다. 정부가 아무리 ‘청와대 내정설’을 부인한다 해도 이 전장관의 무협회장 내정은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2월 2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한국무역협회 총회에서 경선이 무산된 채 기립표결로 이희범 전산자부장관이 새 회장에 선출되자 중소 무역업체 대표들은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이런 방식으로 총회를 할 수 있느냐. 새 회장을 뽑기 위한 경선(競選)을 해야 하는데 기립표결로 회장을 선출하다니 초등학교 반장 선거보다 못하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정정당당히 경선을 했어도 결과는 이희범이 회장에 선출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무역협회측이 확보한 이희범 지지표가 6,671표이며, 무역인포럼측이 확보한 김연호 지지표가 2,617표이기 때문. 이 같은 분석이라면 날치기 같은 기립표결을 하지 않아도 이희범이 무난히 선임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립 표결을 시도한 것은 코엑스몰 분양과 관련, 의혹을 받고 있는 김재철 전임 회장과 신임 회장 간에 비밀 묵계가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아무튼 분석처럼 경선을 했더라면 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된 인사가 민간 협회 회장 자리에 내려앉은 데 따른 ‘낙하산’ 시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도 함께 날아갔다.무역협회 총회는 총회 전부터 재계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낙하산 인사 논란 속에 전임 회장단에서 이희범 전산자부장관을 추대했고, 중소무역업체들의 모임인 무역인포럼이 독자후보 김연호(동미레포츠 회장)를 내세워 사상 초유의 경선을 요구했기 때문.총회가 진행되면서 회장단 대표가 “이희범 전장관은 무역일선과 국제통상 일선에서 사상 최초로 무역 5,000억달러를 달성한 주역이며 무역 1조달러 달성의 적임자”라며 추대 배경을 설명했다.이에 대해 한 중소무역인은 “청와대가 산자부 장관 출신을 일방적으로 내려 보낸 것은 무역인 모두의 자존심을 짓밟는 폭거”라고 맹비난했다.

이로부터 20여 분간 총회장에는 이희범 지지 측과 무역인포럼측 사람들 간에 논쟁이 지속된다. 양측의 공방이 이어지자 김재철 무역협회 회장은 “이희범씨 추대에 찬성하는 분들은 일어나 달라”며 기립표결을 시도했다.이에 절반에 못 미치는 참석자들이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일어났다.김재철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다수가 찬성했다”면서 의사봉을 두드리려 했다. 이때 총회장 곳곳에서 “과반수도 안 됐는데 왜 다수가 찬성했다는 것이냐”며 고성이 쏟아졌다.그러자 김 회장이 “추천할 다른 후보가 있느냐”고 물었고, 무역인포럼측의 관계자가 동미레포츠의 김연호 회장을 후보로 추천했다. 김 회장은 무역인포럼측의 김연호를 무역협회장으로 추천하는 재청을 묵살하며 서둘러 끝내려는 듯 “재청할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발언권을 얻은 한 참석자는 기다렸다는 듯 이희범 장관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이어 김 회장은 “기립한 사람 수에 대해 서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니까 이번엔 이희범씨 추대에 반대하는 분들이 일어나 달라”고 했고 절반에 못 미치는 참석자가 일어나자 “세어 보지 않아도 되겠죠”라며 의사봉을 두드렸다.총회가 끝난 뒤 곽재영 무역인포럼 회장은 “재청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김재철 전임회장의 의도적이고 계획된 시나리오에 의해 저희 측에 재청을 위한 발언권을 주지 않았으며, 여기저기서 발언권을 얻지 못한 채 재청과 삼청의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철저히 묵살 당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곽 회장은 “김재철 임시 의장은 전임 회장으로서 이희범을 직접 추대한 사람으로서 경선시 임시의장을 맡는 것은 경선의 원칙을 무시한 처사”라면서 “임시 의장의 일방적인 진행으로 김연호회장 측의 재청을 무시했다. 내부직원을 동원해 표결에 참여시킨 것은 업무방해이다.

기립 표결을 하였으나 찬반 확인(인원수)하지 않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면서 자료를 검토한 뒤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희범 신임 무역협회장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중기·지방업계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면서 협회 운영과 관련, ‘5대 사업과제’를 제시했다. 그는 ‘무역인프라 강화, 무역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비롯, ▲우리 기업들의 해외진출 지원 ▲회원사들의 글로벌경영 활성화 지원 ▲해외시장 확대와 무역통상 환경 개선노력 등을 임기중 과제로 꼽았다.무역협회장 선출 과정에서 보여준 중소무역인들의 반란은 단순히 관료출신 회장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실제로는 무역협회 활동에 대한 총체적인 불만이 불거져 나온 것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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