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식이 결국 사퇴했다. 취임한 지 14일 만으로 최단명 금융감독원장이라는 오명을 쓰고 말았다. 선관위의 유권해석 때문에 사임을 했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기식은 “법률적 다툼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도리”라고 사임의 변을 밝혔다.
 
문제의 발단을 제공한 더미래연구소는 선관위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사퇴한 김기식은 한동안 ‘법률적 다툼’으로 바쁘게 보낼 것으로 보인다.
 
김기식이나 청와대나 선관위를 믿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선관위는 법원이 아니고 선관위원도 판사는 아니다. 선관위는 선거와 정당 관련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일 뿐이다. 선관위에 위법여부를 문의하고 그 의견을 믿고 일했다가 뒤통수 맞는 경우를 많이 봤다.
 
김기식은 선관위의 위법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못 해석해서 후원을 했다던데, 원래 선관위 의견은 모호하다. 선관위는 선거법, 정치자금법을 귀에 걸었다 코에 걸었다 하는 곳이다.
 
김기식이 마치 금융 개혁의 끝판왕처럼 되어버렸지만 김기식이 금감원장으로 큰 업적을 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삼성도 별로 긴장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김기식이 19대 의정활동 중에 금융업계, 관료들 군기는 잡았지만 삼성을 긴장시킨 존재는 아니었다.
 
총수 일가를 겨냥해서‘삼성생명법’을 발의한 이종걸이나 ‘이학수법’을 발의한 박영선이라면 몰라도. 김기식은 이런 법들의 논의과정에서도 딱히 협조적이지는 않았다.
 
국회 정무위 관련자들, 금융업계 종사자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이 정부는 금융을 너무 모른다”, “금융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균형 잡힌 비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최근 금융업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양상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다.
 
김기식의 임명은 금융업계가 저런 심증을 굳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금융 개혁의 제1과제는 ‘관치금융’이라고 할 수 있다. 김기식이 과연 저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19대 국회에서 김기식은 정무위원회 야당 간사로 금융당국과 금융기관을 쥐락펴락하는 저승사자였다. 김기식은 9명의 보좌진들에게 산하기관을 분담해서 맡기고 밀착마크 하도록 했다.
 
일찌감치 지역구를 물색하는 비례대표 의원들과는 달리 오로지 상임위 활동에만 매달렸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뒤늦게 지역구 출마를 저울질했지만 경선에서 탈락했다. 미래를 대비하면서 더미래연구소를 차렸는데 그게 뒤늦게 발목을 잡은 것이다.
 
김기식은 19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무리하며 ‘땡처리 후원금’으로 텅 빈 통장만 남긴 것은 아니다. 김기식은 19대 국회를 마치면서 아주 충실한 ‘땡처리 정책보고서’라 할 만한 것도 남겼다.

‘정무위 18대 성과와 20대 제언’이라는 432페이지짜리 정책보고서는 정무위의 현안과 과제를 충실하게 담아 많은 호평을 받았다. 김기식은 임기를 마치면서 20대 국회를 위한 ‘정무위 감시감독 가이드라인’을 남긴 것이다.
 
법안심사를 위해 정무위 법안 소위가 열리던 어느 날, 김기식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여당 간사 김용태가 이때다 하고 여당의 관심법안을 일사천리로 통과시키면서 난리가 났다. 야당 의원들은 속수무책, 김기식 의원실에 빨리 의원님 모셔오라고 닦달을 해서 그가 급히 돌아오고서야 회의장은 다시 평정을 찾았다.

김기식은 그런 존재였다. 얄밉지만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제 그가 원한 대로 “공적인 삶을 내려놓고” 자신을 추스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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