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이 있으려면 극한의 고통을 겪어야”

<사진: 이무성 프리랜서>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배우라는 직업을 설명할 때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맡는 배역에 따라 아버지, 회장님, 불한당 등 다양한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래서 ‘배우는 축복받은 직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살아봤으니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덕담과 함께. 배우는 일장춘몽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벼락 인기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대중의 관심이 식어버리면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꾸준히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배우가 있다. 연기력은 물론 인성과 품성을 겸비한 배우들이 그렇다. 배우 정동환도 그중 한 명이다. 

1973년 1000 대 1 경쟁 뚫고 성우 합격, 하지만 1년 만에 사표
4월 24일부터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연극 ‘하이젠버그’ 공연


배우 정동환은 1969년 연극 ‘낯선 사나이’로 데뷔해 올해로 49년째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연극인으로 TV와 영화 등을 오가며 살아온 세월만도 반백년이 다 돼 간다. 1949년생으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또랑또랑하다. 연극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눈빛까지 초롱초롱해졌다. 마치 그가 처음 연극을 접했던 고교 시절 학생의 모습처럼.   

고교 시절 시작한 연극
“연극이 뭔지도 몰랐다”


배우 정동환을 만난 건 지난 17일 오후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예술극장 로비였다. 때마침 대학로에서는 따뜻한 햇살과 함께 이름 모를 밴드의 음악도 흘러 나왔다. 대학로에는 언제나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기자를 만난 정동환은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운 모습이었다. 그는 오는 24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연극 ‘하이젠버그’를 시작한다. 이날 인터뷰는 연극 상연을 앞두고 매일 진행하는 공연연습 시작 전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는 보통 오후 1시반쯤 연습을 시작해 밤 10시까지 계속 한다. 체력 소모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동료, 후배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몸 관리를 한다”며 웃었다. 

정동환은 취미가 산행이다. 그는 “남들에게 목소리 들으면 힘이 있다 그런 소리 듣고 싶다. (평소) 발품 파는 걸 좋아한다”며 “여행도 관광이 아니라 색다른 여행을 가곤 한다. 길을 통해서 많은 걸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네팔의 히말라야도 네 차례나 다녀왔다. 

정동환이 연극에 처음 발을 디딘 건 1965년 중동고등학교 1학년 때다. 당시 재수를 해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재수 시절 남산에서 우연히 연극경연대회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던 그는 연극반에 들어갔고 그해 덜컥 대한민국학생경연대회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당시를 회상하던 정동환은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산에 올라가서 (무엇인가를) 읽고 싶고 소리 내고 싶고 그랬다. 연극이 뭔지도 몰랐다. 연극은 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건 줄 알았다”고 말했다.

베트남 파병부터
사탕수수밭 노동자까지


연극에서 소질을 인정받았던 정동환은 서울예술대학 전신인 서울연극아카데미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을 했다. 하지만 가정형편상 대학에서 연극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군대를 선택했다. 

그에게는 군대도 호기심 투성이였다. 새로운 도전도 하고 싶었다. 군에 입대해서는 베트남행을 자원했다. 이런 행보에 대해 정동환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말했다. 

군 제대 후인 1973년 그는 동아방송 성우에 도전했다. 첫 시험에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정동환은 “기적적이었다. 마이크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며 “사실 당시 다른 후배와 함께 시험을 봤는데 나만 합격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성우는 최고 인기 직종이었다. 성우전성시대라고 불릴 때였다. 영화 더빙 등 이곳저곳에서 활용도가 높다 보니 출세가 보장된 직업이었다. 정동환은 성우에 합격하기 전까지 월급받는 생활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랬던 그는 “매달 월급을 받으니까 좋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입사 1년도 되지 않아 사표를 던졌다. 사표를 쓴 이유를 묻자 그는 “여기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성우를 그만둔 게 인생에서 가장 시원하고 통쾌한 일”이라고 말했다. 

만약 당시에 그가 성우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동환을 TV나 영화, 연극무대에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막상 성우를 그만둔 정동환은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 했다. 또 그 시기 배움에 대한 욕구도 컸다. 

그는 “동남아 연극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오키나와에 있는 학교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일본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다고 말했다. 그러던 차에 일본 오키나와 사탕수수밭에 가서 노동자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일본으로 떠났다.

사탕수수밭 일은 고됐다. 6개월씩 두 번 총 1년을 일했다. 당시 번 돈으로 연극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연극에 대해 
사명감 갖고 있다”


당시 일의 강도를 묻자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막노농 하는 데서 땀을 흘리면 삼대를 빌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막노동하는 데서 땀을 안 흘리면 삼대가 빌어먹는다고 한다”며 “그 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때는 다 재미로 느껴졌다”며 회상에 잠겼다. 그가 일본에서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일하던 시기는 이십대 중반 시절이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정동환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베트남 파병 군인, 사탕수수밭 노동자 등의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있을 수 있었다. 정동환은 자신의 경험을 연기에 그대로 녹여내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동환은 연극쟁이다. 그는 연극에 대해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세월이 지나도 일 년에 한 편씩 꾸준히 연극을 해 온 이유기도 하다. 

그는 “연극을 편하게 못한다”며 자신을 ‘미친놈’ ‘정신병자’라고 표현했다. 그는 연극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다. 그의 인생론과도 맞닿는다. 

정동환은 “(연극은) 편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하게 하려면 하지 말아야 한다. 편해야 하는 일 중에는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며 “어려운 일 속에 좋은 일이 있다. 보람이 있으려면 극한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아주 극한의 고통을 겪고 스스로가 자기를 괴롭혀야 얻어 지는 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사는 거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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