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한 몸으로 출발했다 신탁통치 계기로 분리
광주여대 두영택 교수, “통일 이전엔 관계 개선 요원”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은 남한의 강령을 따르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는 북한의 노선을 지지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민단과 총련의 관계 개선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광주여대 두영택 교수는 20일 "남북이 화해무드로 가지 않는 한 일본 내 민단과 총련도 함께 가는 것이 그동안 이어온 구도"라며 "관계 개선은 통일돼야 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 전국중등교사회장과 대한민국교원조합 상임위원장을 지낸 두 교수는 그러면서도 "현재 민단과 총련은 상층부에서 대결 구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하층부에서는 장사도 같이하고, 자연스럽게 생활에 필요한 왕래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재일동포 사회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300여 개의 단체가 존재했다. 이들 단체대표 등 4천여 명은 하나로 똘똘 뭉쳐 분연히 일어서자며 해방 두 달만인 10월 15일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 모였다.
 
이념을 뛰어넘는 재일동포 사회의 대표기관인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탄생한 순간이다. 그러나 조련은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로 좌익과 우익으로 나눠 대립했고, 반공 청년들은 조련에서 뛰쳐나와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을 결성했다. 이들은 다시 1946년 1월에 만든 신조선건설동맹(건동)과 통합해 같은 해 10월 3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9월 8일 민단을 재일동포 유일의 공인단체로 인정했고, 명칭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꿨다. 민단이란 말은 '백성(民)이 단결(團)해야 한다'는 뜻에서 나왔다. 민단이 탄생하는 사이 조련은 총리 관저 앞에서 데모를 벌이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폭력적인 단체로 변해갔다.
 
이에 일본 정부는 1949년 9월 조련을 해산하고 당시 조련을 장악했던 김천행·윤근·한덕수 등 간부들을 쫓아냈다. 이듬해인 1950년 4월에는 조선인단체협의회, 조국통일전선실행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 단체는 1951년 1월 9일 한국전쟁의 와중에 재일조선민주전선(민전)으로 다시 통합됐다.
 
민전은 내부에서 주류파와 민족파로 나뉘어 서로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다 북한이 재일동포를 '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 한다'는 성명과 함께 한덕수를 공식 지지하자 내부 투쟁을 끝냈다. 한덕수는 1955년 5월 25일 민전을 해체하고 총련을 결성했다.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에 속하는 첫발을 뗀 것이다.
 
일본 법무성의 '일본 내 재류외국인 현황'(2015년 12월 기준) 자료에 따르면, 한국 국적자는 49만 1천711명이다. 또 일제강점기 이전에 건너간 조선적(朝鮮籍) 동포는 3만 3천939명이다. 이들은 한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고, 귀화하지도 않은 일본 법률상의 무국적자다. 일본 정부는 북한과 수교하지 않아 북한 국적자도 무국적자로 분류한다.
 
민단은 중앙본부와 일본 전국 48개의 지방본부, 276개 지부로 구성됐다. 중앙본부 조직은 단장을 중심으로 의장, 감찰위원장 등이 기관을 대표한다. 사무총장 산하에 총무·조직·생활·문교 등 4개의 국(局)과 기획조정실, 민단신문을 두고 있으며, 본국사무소도 운영하고 있다.
 
민단 산하에는 재일본대한민국부인회,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재일한국상공회의소 등 8개의 단체가 있다. 또 각 한국학교와 학원, 신용조합협회, 문화예술협회 등 8개 기관을 두고 있다. 

2015년 말 기준으로 재류동포 49만1천711명 중 33만 929명이 민단 단원으로 등록돼 있다. 오사카에 10만 6천368명으로 가장 많고, 도쿄 8만 9천520명, 효고현 4만2천148명, 아이지현 3만1천657명, 교토 2만5천542명 등의 순이다.

민단의 규모는 그동안 큰 변화 없이 대체로 현상을 유지했다. 반면 총련은 남북한의 경제가 역전되기 이전까지 최대 50만 명 규모에 달했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 총련계 상공인들에 대한 북한 측의 헌금 강요 등으로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특히 1990년대 북한의 식량 위기와 탈북 사태, 조긴(朝銀) 파산, 납치 문제 등으로 일본 국적 취득이나 민단으로의 전향이 잇따랐고, 2000년대 이후 북한 핵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숫자가 급감했다.
 
두영택 교수는 "1960년대∼1970년대 총련의 영향 하에 있던 동포 수가 정점을 찍었다가 지금은 10분의 1로 줄었다. 앞으로 점점 세력은 약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말 기준 전국 63곳에 조선학교는 93개교 운영되고 있다. 2003년 한덕수 의장이 사망하자 서만술이 임명됐다.
 
민단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를 준수하고,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와 경제발전, 문화향상 그리고 세계평화와 국제친선에 기여할 것을 강령으로 삼는 반면 총련은 북한의 주체사상과 적화통일 노선을 그대로 따랐다. 남북 간의 각종 현안에 개입해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등 '대리전'을 치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미대사관 경제외교관을 지낸 송하성 경기대 교수(한국공공정책학회 회장)는 "지난 72년간 민단과 총련은 대결할 수밖에 없었고, 동포 간 피를 흘린 아픈 역사가 많이 있다"며 "이념 대결이 극에 달했을 때는 축하분위기 속에서 치러져야 할 결혼식장에 모여서도 서로 주먹질을 하고 싸우는 혈투를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양측은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남침용 땅굴 발견과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으로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입장을 달리하며 얼굴을 붉혔다. 민단 관계자들이 도쿄에 있는 총련 건물로 달려가 시위를 하며 만행을 규탄하면 총련 측은 기관지 조선신보를 이용해 대응했다. 노무현 정부 때 벌어졌던 '5·17 사건'은 양측 갈등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당시 남북 화해무드를 타고 민단 하병옥 단장이 총련 중앙본부를 찾아가 서만술 의장을 만나면서 극적인 해빙드라마를 연출하는 듯 했지만 나중에 하 단장이 총련계 인물로 밝혀지면서 동포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6.15 남북 정상회담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 하루아침에 '간첩사건'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민단은 총련과의 대결구도 속에서도 지문날인 거부와 지방참정권 획득 운동, 조직 활성화와 차세대 육성 노력, 조국 평화통일 지원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민단은 조직 활성화를 위해 '차세대 육성' 사업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모국 견학 프로그램인 재일동포 어린이 잼버리, 4개의 민족학교 지원, 어린이 토요학교 전국화 및 민족학급 지원 등이 구체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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