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무 회장의 행보가 바빠졌다. 구 회장이 ‘10년 후 LG’를 위해 그룹 내에 ‘모종의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룹 내부 측의 한 인사는 ‘포스트 구본무’에 대한 사전준비와 함께 ‘신 성장 엔진을 발굴’하기 위한 전사적인 노력으로 설명된다고 전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을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는 후계구도와 LG그룹의 사업영역 변화를 파헤쳐봤다. 구본무 회장이 ‘10년 후 LG’를 위해 준비하는 ‘거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는 슬하에 아들이 없는 구 회장의 입장에선 10년이 지난 후 ‘포스트’ 구본무를 확정짓는 일이고 다음은 LG가 10년 뒤에도 소위 ‘일등LG’로 거듭나기 위한 차세대 성장엔진 즉 신사업을 발굴, 한시바삐 안착시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구본무 회장이 첫째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구광모(27)씨를 양자로 입적하자, 재계에선 구본무 회장의 후계구도를 구축하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이 아니냐는 평을 잇달아 내놓았다. 특히 광모씨가 양자로 입적하기 전인 지난해 초부터 LG의 지주회사인 ㈜LG 주식을 꾸준히 매입, 지분을 늘려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LG그룹측의 입장은 단호했다. “앞으로 10년이나 후에 있을 일을 벌써 예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한 것이다. 그렇다. 현재 예순에 불과한 구본무 회장은 정정하기 이를 데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지방 공장으로 리무진 버스를 타고 현장경영을 실천하는 것만 봐도 건강에는 자신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LG 측의 ‘당장 그룹 승계를 확정지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 타당한 소리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면 칠십이 되는 구본무 회장이 여전히 LG그룹 총수에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일부에선 “10년 후의 일이라도 이제부터 준비해나가야 탈 없이 그룹승계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민단체나 정부의 눈초리가 재벌가의 상속에 대해 해가 넘어갈수록 매섭게 변해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실제로 법정공방 중에 있는 이제용 상무의 삼성 에버랜드 편법증여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96년에 시작됐다. 이런 점을 따져볼 때 구광모씨의 양자입적과 동시에 광모씨의 LG 주식매입은 10년 후 그룹승계와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고 볼 수 없게 됐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그룹측의 주장도 이런 논리에 따르면 전혀 먹히지 않는다. 근래에 들어 시민단체 등 여론의 매서운 눈초리로 재벌가의 경영권 편법승계를 바라보는 상황에서 구씨 일가가 미리미리 준비해서 나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소리도 나온다.

현재 광모씨의 LG지분은 2.80%로 최대주주 구본무 회장을 필두로 특수관계인 지분 순서대로 볼 때 ‘넘버 7’에 불과하다. 최대 지분 순으로 구본무 회장(10.33%), 구 회장의 둘째 동생 구본준 LG필립스LCD 부회장(7.50%),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4.76%), 구 회장의 셋째동생 구본식 희성전자 사장(4.30%), 구 회장의 부인인 김영식씨(4.25%), 구자경 명예회장의 둘째사위 최병민(2.80%)씨 다음이다. 표면적인 지분순서대로 따져볼 때 지난해와 올해 광모씨의 주식 매입이 늘어났다고 해도 아직은 그룹 승계까지는 좀 거리가 있다. 이는 추가 주식매입에 따른 자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8%까지 지분을 올리는데도 어림잡아 600억원이라는 거액이 필요했다. 아무리 재벌가의 자제라고 해도 올해 서른 살이 채 안된 유학생이 감당하기엔 큰 액수다. 게다가 추가로 몇 배를 더 내놔야 할 판이라 잠시 숨고르기에 나섰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일부에선 더 이상의 주식매입은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광모씨의 친부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지분 4.76%를 합치면 구본준 부회장을 제치고 넘버 2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LG그룹을 이끌 후계자는 광모씨로 낙점된 것일까. 그리고 구본무 회장의 둘째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과 양자인 광모씨간의 경영권 나눔과 재산분할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이처럼 아직 구 회장이 풀어야할 후계 구도와 관련된 숙제가 산적해있는 상황이다. 후계구도와 함께 구본무 회장의 또 다른 고민의 한축은 10년 뒤에도 지금의 LG가 존재하기 위해 소위 ‘삼성전자의 반도체’와 같은 어떤 기업도 넘볼 수 없는 주력사업을 발굴, 견고히 해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작업이 바로 올해, 늦어도 내년에는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위기위식이 구 회장은 물론 그룹 내에 팽배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한 언론사에서 주요 증권사 리서치센터장, 투자전략팀장, 펀드메니저 등 총 50명에게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향후 10년 뒤 한국의 GDP(국내총생산)성장과 주식시장을 이끌어나갈 종목으로 삼성전자가 26%의 응답을 얻어 1위에 올랐다. 삼성그룹은 10년 후에도 반도체, 휴대폰 등 소위 캐시카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전업계 라이벌을 자처하고 있는 LG의 고민이 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신사업 구축을 위한 M&A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구체적인 M&A 시나리오가 하이닉스반도체와 하나로텔레콤의 인수설이다. 업계에선 두 곳 가운데 적어도 한 곳은 구본무 회장의 품에 안기지 않겠느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과거 구 회장이 눈물을 머금고 품에서 놓은 LG반도체의 전신인 하이닉스반도체의 인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9년 현대반도체와 LG반도체의 합병이후 불편한 심기 때문에 이후로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됐다는 일화가 유명한 얘기다.

문제는 ‘실탄’ 즉 인수자금이다. 업계에선 하이닉스반도체 인수에 적어도 2조원 가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이닉스의 채권단측이 올해 매각할 22.8%의 지분이 그 정도다. 물론 독자인수를 탈피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인수를 시도하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동안 계열사 지분을 조금씩 매각하면서 준비해놓은 저축액도 적지 않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LG측은 선뜻 인수의향을 밝힐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려는 곳이 적지 않기 때문에 먼저 표적이 되어 공공의 적으로 몰릴 필요가 없다는 계산에서다. 이와는 별도로 하나로텔레콤의 인수전에도 가세할 것이라는 증권가의 소문도 끊이지 않고 나돈다.

데이콤, 파워콤, LG텔레콤 등 굵직굵직한 통신사를 갖고 있는 LG지만 뭐하나 똑 소리나게 잘 하는 구석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에 구본무 회장이 관련 업계 2위인 하나로텔레콤 인수에 눈독을 들인다는 지적이다. 하나로텔레콤 인수에도 사실 적지 않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통신공룡 KT와 이동통신의 강자 SK텔레콤의 보이지 않는 견제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래서 일까. LG측은 이러한 M&A시나리오에 대해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을 지금껏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증권가에선 이러한 LG의 입장은 연막작전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업계에서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10년 후의 LG’를 위한 첫 단추가 이미 채여지고 있다는데 이견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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