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 과거 국가정보원의 살벌한 모토가 아니다. 회장님의 그림자인 그룹 비서실장을 지칭한 말이다. 재계 총수들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수행하는 이른바 ‘No3’들의 처신 철학이기도 하다.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일하는 것이 No3의 미덕이다 보니 외부의 노출을 극히 꺼리지만 총수 곁에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눈과 귀, 때론 수족의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총수의 위기관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 넘버3의 중요성은 크게 대두되고 있다. 그룹 내 의사소통, 의전, 정보수집 등 물밑에서 수행되는 비밀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넘버3의 숨겨진 면면을 살펴봤다.“죄송합니다. ‘이사대우’이기는 하지만 비서실의 특수한(?) 임무 때문에 사진을 보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약력이라도….”“거듭 죄송합니다. 약력도 알려드릴 수 없는 것을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비서실장은 지근에서 회장님은 보좌하는 업무라 대외적으로 사진이나 이력을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현대·기아차는 지난 7일자로, 올해 35세에 불과한 비서실의 이봉재 부장을 비서실장으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발령했다. 하지만 이 실장에 대한 취재는 총수인 정몽구 회장보다 더 뚫기 힘든 철옹성이었다. 비서실의 업무 자체가 실체를 밝히기를 꺼려하는 분위기이기 때문. 한마디로 노출을 꺼려하고 있다는 소리다. 특히 현대차 내부에서는 정의선 기아차 사장 등 오너 일가를 제외하곤 30대 임원이 탄생하기는 처음 있는 일로 정 회장의 심중이 들어가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현대차 관계자는 “김 전 비서실장은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기 때문에 바뀐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며 “특히 비서실의 경우 다른 사업부서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임원 승진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확대해석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회장님 비서, 보이지 않는 실세

과연 그럴까. 그룹 총수 비서실장이 어떤 자리인가. 각 그룹 회장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챙기는 곳이 비서실이고 이곳의 우두머리가 비서팀장(실장)이다. 대외적으로 얼굴이 잘 알려지지도 않고 직급도 높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실세’로 통한다. 그룹 회장들의 심중을 속 시원히 알고 싶으면 이들을 찾으면 되겠지만 있는 듯 없는 듯한 것이 이들이다. 업무만큼이나 행동과 입이 천근만근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마음을 가장 잘 읽는다’는 평가를 받는 이로 구조조정본부 내에 이학수 본부장이 손꼽히지만 내부에선 이에 못지않게 이 회장의 심중을 꿰뚫는 사람으로 비서실의 김준 팀장(전무)을 지목한다.

지난해 왕성한 해외출장을 다녔던 이 회장의 곁에 먼발치이기는 하지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좌하는 김 전무를 목격할 수 있다. 이번 건강검진을 이유로 미국에 장기체류 중에 있는 이 회장을 지근에서 보필하는 이도 김 전무다. 태평로 삼성 본관 28층 회장실 바로 옆에서 근무하는 김 전무는 구조조정본부 내에 있는 재무·인사·경영진단·홍보 등 주요 팀의 업무를 취합해 이 회장에게 보고하는 일을 맡고 있다. 구조본 회의에 참가하는 사장단과 회장 간의 실무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는 창구역할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난 2001년 이창렬 부사장의 후임으로 지금까지 비서실을 이끌고 있지만 실제론 지난 94년 회장비서실 부장으로 부임 하면서 비서업무만 12년째 맡고 있는 베테랑이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 전무는 “외부에 노출되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극히 자제하며 비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전형적인 이 회장의 그림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김 전무가 이 회장의 그림자’라는 데 대해 ‘지나친 비약’이라고 삼성관계자는 주장한다. 이 회장을 가장 지척에서 모시고는 있지만 “비서는 비서일 뿐 그룹의 실세처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 전무가 물밑에서 회장을 보좌하는 ‘숨은 일꾼’이라는 데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회장의 분신 ‘24시간’ 수행도

실제로 이 회장이 부르면 새벽이라도 이 회장 자택(한남동)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노고’를 인정받아 올해 초 인사에서 전무로 승진했다. 하지만 위상에 비해 부사장급 이상인 구조본 내 각 팀장에 비해 나이도, 직급도 아래인 점이 특이하다. 그룹내에서 비서실의 숨은 파워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 롯데그룹의 비서실과 요식업 관련 그룹관계사간의 회동사건이다. 지난 6월 중순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롯데그룹 회장 비서실에선 김성회 전무(비서실장) 주재로 조그마한 미팅이 주재되고 있었다. 이 자리는 물론 비공식적인 회의였고, 회의록도 없었다. 20여분 정도의 짧은 회의였지만 비서실측에서 신격호 회장에 관련한 각별한 주의 요청이 이어졌다.

롯데그룹 비서실은 회사 내부에서 가장 파워가 막강한 핵심부서 중 한 곳이다.우선 신 회장은 1년에 절반만 한국에 머문다. 그는 1년을 월별로 나누어 홀수 달에는 한국,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무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하다 국내로 확장시켜나간 신 회장은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대선비자금혐의 등으로 몇몇 불미스러운 혐의로 몇 개월간 일본에 장기체류하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신 회장은 재계에서 최고령의 원로 경영인이다. 그는 1922년생으로 올해 한국 나이로 84세로 현재 재계에서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창업 1세대 경영인이다. 따라서 비서실의 입장에선 고령의 ‘회장님’을 모시는 것 자체가 여간 신경 쓸 일이 많은 게 아니다. 더군다나 신 회장의 차남이자 그룹의 후계자로 낙점 받은 신동빈 부회장은 일본에서 자라 한국어보다 일본어로 말하는 것이 편할 정도다.

최고 실세들 거쳐가

비서실에서 대외적으로 말수를 극히 제한하도록 요청한 것도 신 부회장의 능숙하지 못한 한국어 때문이다. 결국 신격호 회장의 잦은 일본 출장에 대한 건강관리부터 우리말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는 신동빈 부회장의 관리까지 해야 하는 이중고덕분으로 그룹 내 위상은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 한가운데 비서실장인 김성회 전무가 있는 것이다. 사실 롯데그룹은 지난 97년 말부터 비서실을 부속실로 명칭을 바꿔 불러왔다. 하지만 돌연 지난해 말 비서실을 부활 시키고 지금까지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에 대해 롯데측의 한 관계자는 “회장, 부회장의 개인 비서역할에다 의전 등을 수행하는 통상적인 비서팀에 불과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김 전무의 파워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룹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비서팀장인 인유성 상무도 구 회장의 입장에선 ‘수족’ 같은 존재다. 인 상무는 LG전자로 입사해 LG필립스LCD의 ‘시장전략담당’으로 일했다. 그러다 지난 2002년 당시 LG 구조조정본부 비서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구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됐다. 지난 2003년 상무로 승진한 후 지주회사로 출범한 LG의 비서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총무, 시장전략, 기획 등 주요 업무를 두루 거친 이력에다 4년간의 해외법인 근무로 국제적 감각까지 갖춰 구 회장이 최근 부르짖는 글로벌 경영, 현장 경영에 제격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부쩍 늘어난 총수의 국내외 출장과 전략회의 주재 등에 대한 일정조절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 회장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보니 위상은 만만치 않다. 2001년부터 최태원 SK회장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박정호 상무도 SK 내에서 최 회장의 ‘분신’으로 통할 정도다. 최 회장과 일정을 함께하며 수행을 보좌하는 비서실장을 넘어 ‘전략 참모형’이라는 게 주변의 평가다. 최태원 회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최근 최 회장의 이미지 변신에 상당한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과 비슷한 연배인데다 고대 동문으로 때로는 친구처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알려졌다. 격식을 따지기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최 회장의 코드에 안성맞춤으로 평가받는다. 박 상무는 고려대 경영학과와 조지워싱턴대 MBA 출신으로, SK텔레콤 뉴욕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SK텔레콤 ADR(미 예탁증권) 발행 등 글로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해온 국제금융 전문가이기도 하다.

총수와 격의없는 대화도 나눠

사실 그룹 내 비서실의 업무의 핵심은 정보의 수집과 분석쪽으로 변모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세계의 각 지점으로부터 올라온 각종 정보를 바탕으로 모든 상황에 대해 총수에게 보고한다. 어찌보면 총수의 입장에선 귀와 눈이 되는 곳이 비서실인 셈이다. 비서실의 중요성에 대한 한 일화가 있다. 이데이 전 소니 회장이 세계적인 경제학자 피터 F. 드러커 박사와 나눈 대담에서 드러커 박사는 글로벌 기업에는 5명의 최고집행 책임자가 있어야 하는데 대표이사외에 미래 비전을 담당하는 CEO와 재무, 인사, 홍보, 담당CEO 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이데이 회장은 거기에 한 사람을 더 추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정보담당 CEO, 즉 CIO(chief information executive)였다. 이를 국내그룹에선 비서실에서 맡아가고 있는 것이다.

# 정몽구 회장이 ‘김승년 비서실장’ 내친 진짜 이유는?
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으로 발령, 3세 승계 사전 포석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이 최측근으로 평가받던 김승년 비서실장을 물러나게 한 후 30대 중반에 불과한 이봉재 부장을 비서실장으로 바꾼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후계구도가 확고하게 정립되고 있는 외아들 정의선 사장에게 힘을 실리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 세대 경영인들을 물러나게 하고 젊고 참신한 인물들로 회사 조직을 바꿔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정 회장은 근래들어 잦은 인사를 통해 물갈이를 대폭 추진했다. 특히 지난달 20일에는 정 회장의 최측근이자 창업 1세대인 박정인 현대모비스 회장이 고문으로 물러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면 김승년 전 비서실장에게 좀더 무게 있는 업무를 맡기려는 정 회장의 뜻이 작용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가 자리를 옮긴 구매총괄본부는 사실 현대차그룹내에서 최고의 요직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구매총괄본부의 지난해 자재 구입비는 27조원. 올해는 30조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이는 정부 조달청의 올해 사업계획 25조원을 훨씬 넘는다. 구매총괄본부는 정몽구 회장 직속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구매총괄본부에서 다루는 돈이 천문학적이고, 수천개 납품업체를 상대하다 보니 각종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회장의 의중을 잘 아는 실세들이 대부분 구매총괄본부를 거쳐갔다. 15년간 정몽구 회장을 수행했던 김승년 비서실장(전무)을 그룹 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으로 발령 낸 까닭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게 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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