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대가 떠난 TV, 소재의 중년화·다양화로 세태 반영…예능도 이미 장악
- 중년에 접어든 인기 스타들의 농익은 연기, 삶의 무게와 진한 여운 전해


 
김선아, 감우성(왼쪽부터)
   [일요서울 | 김종현 기자] 안방극장을 달구던 청춘 멜로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면서 최근 변화된 세태가 반영됐다는 의견이 나온다. 특히 그간 브라운관을 점령했던 청춘들의 풋풋함을 대신해 중년로멘스의 애잔함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어 ‘어른 멜로’의 열풍이 지속될 지를 두고 이목이 집중된다.
 
과거 중년 멜로는 불륜으로 대변하기에 급급했다. 여전히 아침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불륜뿐만 아니라 중년의 불륜관계도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방송가가 새로운 소재로 일명 ‘어른 멜로’를 선보이며 세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지난 24일 40부작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는 성숙한 사람들의 서툰 멜로드라마로 설명된다.

주연을 맡은 40대 감우성과 김선아가 나선 만큼 진중한 삶의 무게를 담아냈다. 세월 만큼 희로애락을 겪었음에도 어딘가 결핍되고 불완전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큰 존재로 인식되는 과정을 잔잔히 그려냈다.
 
성숙한 사람들의
서툰 멜로 눈길

 
감우성이 연기한 손무한은 “오십이다. 이제, 내일모레면, 너도 내가 늙었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는 넌 몇 살이니?”, “저는 마치 서쪽 바람처럼 늙었으며 새로 태어난 애벌레만큼 어리기도 합니다”라며 스마트폰 인공지능(AI) 프로그램과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를 걱정하는 외로운 중년을 그려냈다.
<사진=방송캡처>
 그는 이혼남이자 광고회사 이사로 잘나가지만 어느 날 혼사 사는 집에서 고독사한 채 발견될까 걱정하는 요즘의 중년 남성을 대변한다.

상대역인 안순진도 파격적이다. 기존 공식을 따랐다면 띠동갑 정도 되는 젊은 여성이 등장했겠지만 그는 “폐경 오고 갱년기 오면 독거노인이야. 독거노인이 언니의 미래야”라는 잔소리를 듣는 ‘꺾어진 구십’이자 남편의 불륜을 경험한 이혼녀였다.

두 사람은 그 흔한 불륜이 아닌 궁상맞고 지질하지만 이혼을 겪은 중년의 사랑을 그려내면서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특히 이들의 사랑은 그간 주로 그려진 판타지가 아닌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시청률 순항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같은 진한 애잔함을 그려내는 데는 배우들의 몫이 컸다. 감우성과 김선아의 농익은 연기력은 극의 몰입도를 극대화했다.

물론 당사자들은 힘든 작품이라고 토로한다.

김선아는 지난 26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어른 멜로라서 그런지 몰라도 감정의 깊이가 이전에 했던 작품들보다 깊은 것 같아서 어려웠던 것 같다”면서 “별 거 아닌 말을 별것처럼 얘기하는 게 많았다. 남녀가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닌데 이해가 깊다고 해야 할까. 중간 중간에 ‘난 아직 철이 안 들었나 봐’라고 했을 정도”라며 고충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처럼 멜로의 공식이 깨지면서 드라마에서 양념처럼 등장했던 중년의 러브스토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등 콘텐츠 환경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지진희, 김남주(왼쪽부터)
  지난달 종영한 JTBC ‘미스티’는 ‘어른 멜로’ 열풍의 도화선이 됐다.

‘미스티’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인기 앵커 김남주(고혜란 역)과 그의 변호인으로 나선 남편 지진희(강태욱 역)의 관계를 풀어내며 욕망으로 똘똘 뭉친 아내와 이를 안타까워 하면서도 끊임없이 보듬어주는 지진희의 순애보가 묘하게 교차하며 흥미를 이끌었다.

그 바통을 MBC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이하 ‘손 꼭 잡고’)가 이어 받았다. ‘손 꼭 잡고’는 초등학생 딸이 있는 현주(한혜진 분)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뒤 주치의 석준(김태훈 분)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등장인물들은 ‘불륜’에 초첨을 맞추지 않고 있다.

KBS ‘같이 살래요’는 60대 황혼 로맨스를 그려내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뒤 혼자 사는 효섭(유동근 분)에게 36년 전 첫사랑 미연(장미희 분)이 나타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실제 주인공을 맡은 유동근은 제작발표회에서 “아버지이기 이전에 남자의 시간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고 전했다.
 
김태훈, 한혜진(왼쪽부터)
  단순 멜로보다
다양한 이야기 주목

 
반면 그간 드라마 주도권을 쥐고 있던 청춘 멜로의 몰락은 뼈아프기만 하다. 아이돌 출신 윤두준과 김소현을 내세웠던 KBS2TV ‘라디오 로맨스’는 3%대 시청률에 머물렀고 걸그룹 레드벨벳 조이와 우도환 등이 주연을 맡은 MBC ‘위대한 유혹자’ 역시 1~2%대 시청률로 고전하고 있다.

물론 ‘위대한 유혹자’의 경우 MBC가 파업 여파로 제대로 된 드라마 편성을 하지 못하면서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얼마 안 남은 종방까지 시청률 빈곤을 겪고 있어 제작진은 물론 배우들에게도 부담으로 남게 됐다.

청춘물 대신 속속 등장하는 ‘어른 멜로’는 소재 확장 및 타깃 설정에 대한 드라마계 고민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대다수다.

그간 젊은 층에 어필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 일색이던 미니시리즈 시장에 판타지와 장르극이 등장하며 판을 흔들었고 한동안 ‘색다른 소재’를 찾는 데에만 열중하던 드라마 제작진은 인물과 인물이 소통하면서 만들어 낸 감정으로 시청자를 매혹하는 멜로에 다시 눈을 돌렸다는 것.

여기에 요즘 나이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결혼을 미루거나 이혼하는 부부가 속출하는 사회현상이 반영되면서 이제는 중년의 멜로가 시청자들에게 어색하지 않다는 점도 ‘어른 멜로’ 열풍을 부채질하고 있다.
유동근, 장미희(왼쪽부터)
  시청자층의 세대 변화도 소재의 중년화를 부추기는 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그간 시청률을 좌우했던 10대가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 따라 TV를 떠나는 것도 기존 청춘물이 맥이 빠진 이유다.

한 전문가는 “유튜브나 포털 영상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긴 호흡의 TV 드라마를 더 이상 소비하지 않는다. 결국 TV 앞에 남게 되는 중년층을 겨냥한 멜로물을 제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중년화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계를 장악하는 등 방송 콘텐츠의 변화를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SBS ‘미운 우리 새끼’, MBC ‘라디오 스타’, JTBC ‘아는 형님’, SBS ‘불타는 청춘’ 등 인기 예능의 주요 등장인물이 중년 스타들이라는 점도 달라진 모습이다.

여기에 tvN ‘윤식당’, ‘꽃보다 할배’ 등은 노년 배우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일명 ‘실버 예능’을 선보이면서 다양성에도 불을 붙였다.

한 드라마평론가는 “과거 중년의 로맨스는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분위기였다면 요즘은 주어진 상황과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심각한 취업난에 연애도 결혼도 포기한다는 20대 청춘 멜로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어른 멜로’의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송승진 기자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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