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1987년 작고)의 6녀인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이 직접 쓴 부친 이병철 회장에 대한 육필 원고이다. 부친과의 사이에 있었던 숨은 비화, 그리고 사업가로서의 야망, 신세계그룹의 미래 등을 담은 이 원고는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모을 전망이다. <일요서울>은 이 회장의 원고를 긴급 입수해 연재한다.<편집자>평생 아버지를 모시면서 아버지를 닮고자 노력했지만, 기업을 경영하면서 요즘처럼 아버지의 이 말씀이 내 피부에 와 닿은 적이 없었다. 현대는 글로벌 시대다. 글로벌 경영감각이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는 시대인 것이다.우리보다 한 세대를 앞서 사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시대를 내다보시고 이같은 말씀을 하셨는지, 새삼 그 분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따름이다.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이 메시지는 우리 신세계 임직원은 무론 국내 다른 기업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격적인 글로벌 경쟁시대를 맞아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깨우쳐주고 있기 때문이다.<내가 느끼는 아버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점들

최근에 우리가족 이야기가 드라마로도 나오고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책으로도 나와 있어서, 오히려 나보다 주변 사람이 우리 가족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아버지와 막내딸인 내가 느끼는 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아버지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 는 지론을 가진 분이다. 실수가 두, 세 번 반복되어도 혼내지 않는다. 몇 번을 참고 모른척하다가도 그 실수가 다섯 번이 되면 나눠서 할 다섯 번의 질책을 한꺼번에 모아서 하셨다.판단력을 중시하신 아버지는 몇 차례 교육시켜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판단력이 없다고 생각하셨고 또한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과감히 포기하셨다. 필요하면 포기하고 체념도 빠르셨다. 그것이 본인에게 뼈를 깎는 아픔을 수반할지라도 과감하게 결단하고 가차없이 행동하셨다.

감성과 냉철함의 조화

외부에서 보는 아버지는 강한 사람이었으나 사실 매우 감성적인 분이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기를 원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일본 현지 법인의 비서가 한국에 관광왔을 때 아버지는 일본인 비서에게 용돈을 얼마나 줘야 좋을지를 고민했다. 옆에 있는 비서에게 용돈을 얼마나 주는 것이 좋을까 물었을 때, 회장님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답변을 한 비서를 냉정하다고 나무라시는 분이셨다.그러나 이성과 감성은 명확히 구분하셨다. 아버지는 자녀들과 직원들이 이성에 바탕을 둔 풍부한 감성을 지니기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감성이 풍부한 것 보다는 냉철함과 감성을 함께 지닌 사람을 좋아했다. 가족 중에는 감성이 풍부했던 편인 나를 특별히 대해 주셨다.평소에 시가를 즐기는 애연가셨던 아버지는 76년 위암, 86년 폐암 판정을 받고 87년에 돌아가셨다.

1976년 아버지가 최초로 위암 판정을 받았을 때 집안의 공기는 무거웠으며 사람들은 차마 아버지께 위로의 말씀도 붙여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하지만 나는 아버지 곁에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철없이 우는 막내딸에게 아버지는 그간 조사한 수술 의사의 경력에서부터 위암 완치사례, 치료계획 등의 자료를 보여주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분은 암 판정 앞에서도 자신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조사했던 분이다.아버지가 동경에서 수술을 받을 때 내가 동행했다. 수술이 끝나고 난 후 아버지께 수술실에 들어갈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느냐고 여쭤 보았더니 “니가….” 라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였다. 나는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이 모습이 나중에 ‘이병철 회장이 딸을 안고 울고 있더라’ 라는 소문으로 한동안 그룹 내에서 회자되었다고 들었다.

인간적으로 반한 아버지

나는 아버지께 인간적으로 반했고 아버지도 나에게 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모시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하루 하루를 즐겁게 보내실지, 또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 감동을 드릴 수 있는지를 계속 생각하고 실천했다. 감동은 물질에 앞서 따뜻한 마음과 인간관계에서 우러나온다. 시간이 지난 후 느끼는 감동은 더 깊은 맛이 난다.주위에서는 냉철하다고 잘못 알고 있기도 했지만 사실 아버지에겐 섬세하면서도 여성적인 면도 있었다. 화려한 넥타이와 핑크색 와이셔츠를 입는 것을 즐기셨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핑크색 단추를 달아 화려한 와이셔츠를 만들어 드렸고 아버지가 쓰는 초라한 만년필에 조그만 액세서리라도 붙여 드리려고 애썼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물질과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편하다.

몰두하되 절제한다

요즘 읽은 ‘하워드 가드너’의 ‘창조적 마인드’라는 책 내용중에 “대부분의 리더는 호기심이 강한 편이며 자기성찰을 통해 능력을 계발한다. 독서를 즐기고, 광범위한 분야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습득하는 천부적 재질이 있는 반면, 다른 일부는 평생에 걸쳐 어린이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구절이 있다. 아버지도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계셨다. 따라서 성격상 한번 관심을 갖고 연구하면 끝을 보기 때문에 지식의 폭은 아주 좁지만 그 깊이는 매우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좋아하는 분야는 정통하게 되지만 관심이 없는 분야에는 문외한이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는 자기 절제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셨다. 취미생활 또한 사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절제하게 행동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항상 절제된 삶을 추구했고, 낭비도 하지 않으셨다. 방에 필요없는 전등을 직접 소등하셨으며 화장지도 반을 잘라서 쓰실 정도로 검소한 분이셨다.“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나면 나중에 할 것이 없게 되고, 한도 끝도 없이 하게 되면 허무가 온다”고 하시며 여백의 미를 남겨두셨다. 그것은 자기절제와 감정조절이라는 말로 축약될 수 있다.절제는 욕구절제, 감정절제, 취향절제 등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가지를 실행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욕구절제인데, 이는 부단한 수양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며, 두 번째로 어려운 것은 감정절제로서 그 사람의 타고난 인품과 밀접하다 할 수 있다.그나마 가장 쉬운 절제가 세 번째의 취향절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낭비를 절제하는 것은 물론, 근면함과 검소함이 몸에 배도록 하는 것으로, 본인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절제는 우아하다.

선견지명과 끝없는 호기심

현대 경영에서는 CEO의 적정나이를 50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68세때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어 73세때는 64KD램을 개발 생산해 내셨다. 아버지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살아갈 길은 부가가치가 높은 반도체 뿐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전쟁 종전 이후 국민들에게 모자라는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하신 것과 같은 이유이다.아버지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려 했을 때 주변 참모들의 반대가 많았었다. 당시에는 축적된 기술력도 거의 없는데다가 막상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제품이 출시될 즈음에는 일본에서는 그보다 앞선 차세대 제품을 출하하여 가격이 폭락하고 수익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념과 선견성을 가지고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셨다. 병상에서 암과 투병하시면서도 반도체 실적을 보고 받으셨다. 담당자들을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이다. 이 모두가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버지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의 노쇠한 육체를 지켜주는 마지막 힘이었던 것 같다.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1987년, 아마 카폰이 처음 나왔을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호기심이 많고 변화무쌍하며,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셨으며, 특출난 것을 좋아하고 평범한 것은 싫어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이 인터넷, 핸드폰으로 연결되는 세상을 못보시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가장 많은 정보를 가졌으면서도 정보에 목말라했던 아버지가 이 세상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며, 한 없는 그리움을 느낀다.

말보다 행동으로 준 교훈들

아버지와 나는 많이 닮았다. 체질, 성격에서부터 취향, 생김새, 좋아하는 음식까지 모든 것이 닮았다. 특히 관심있는 것에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은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맛이 있는 음식을 발견하면 아버지와 함께 일주일 동안 그것만 먹기도 했다.내가 아버지를 닮게 된 것은 아버지를 가까이 모시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과 행동까지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든 것은 행동으로 표시할 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어서 아버지의 속내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대신 자신의 행동을 통해 모범을 보이셨고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 형제들은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아버지에게 배운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피부에 와닿고 그 무게를 더해갔다.

아버지는 우리가 어른 앞에서 자식을 안고 어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항상 엄하게 교육시키고,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을 지키도록 하였다. 성공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부심이 생기기 마련이다.자부심은 나쁘지 않지만 그것을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은 자만심이다. 따라서 이 자부심을 숨기는 것이 겸손이며, 이것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본능을 조절하고, 상황에 맞도록 자신을 스스로 절제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도록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이 나의 교육 방법이다.이런 생각 또한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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