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살인범 김모씨, 16년 만에 무기징역 단죄
“망자의 恨 풀다”…‘태완이법’ 적용 유죄선고 첫 사례

 
“접촉한 두 물체 사이에는 반드시 물질 교환이 일어난다”(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
 
현대 과학수사의 개척자로 불리는 로카르의 교환법칙은 수사기관에선 절대 명제(命題)로 여겨진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란 명제를 가슴에 새긴 감식반원이 현장(現場)을 샅샅이 뒤지고, 형사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시신 옆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범인(犯人)이 무심코 스치고 밟았던 곳, 만졌던 것, 남긴 흔적은 모두 증거(證據)가 될 수 있다.
 
과거부터 쓰이던 지문(指紋) 인식과 진화를 거듭한 DNA 감식은 과학수사의 비약적 발전으로 이어져 범인들의 ‘완전범죄’ 구상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
 
2001년 2월 전남 나주시 드들강에서 박모(당시 17세)양이 알몸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 김모(41)씨는 범행 직후 개 12마리를 훔친 혐의로 구속돼 교도소에 들어가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은폐했다. 수사(搜査)에 나선 경찰은 당시 여고생 체내에서 정액을 발견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장기미제가 된 이 사건은 2012년 또 다른 강도살인으로 무기징역형이 확정돼 복역 중이던 김 씨의 DNA가 당시 발견된 DNA에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하지만 김 씨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고, 검찰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하지 않았다.
 
2015년 7월 살인죄 공소시효가 폐지되자 경찰과 검찰은 사건 재수사를 결정했다. 검찰은 박양 체내에서 검출한 생리혈과 김 씨의 정액이 서로 섞이지 않은 점을 근거로 성폭행과 살인 사이의 시간이 아주 짧았다고 판단했다.
 
법의학자는 박양이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섞일 수밖에 없는 두 액체가 따로 존재한 것은 성폭행과 살인에 시간적 밀접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이는 김 씨가 여고생을 성폭행한 뒤 곧바로 살해한 유력한 정황인 셈이다.
 
2015년 10월 8일 검찰은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 처분한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김희준 광주지검 차장검사는 이날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방침이다”고 밝혔다. 당시 경찰이 14년 전 발생한 이 사건의 용의자를 재수사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재송치한 데 따른 것이다.
 
김 차장검사는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와 중요도를 감안해 강력부장 검사를 주임검사로 하고 경찰에서 넘어온 기록을 검토 중이다. 추가 증거를 검토 중인데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당시 검찰이 2014년 10월 무혐의 처분한 뒤 1년여 만에 사건 재검토에 나서면서 또다시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됐다.
 
경찰은 2015년 3월 전담반을 꾸려 과거 수사기록을 재검토하고 비슷한 범행 수법 등의 증거를 보강했다. 검찰은 피의자의 수감실을 압수수색하고 증거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검찰은 2016년 4월 27일 피의자 김 씨가 복역 중인 광주교도소 수감실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김 씨가 개인함에 보관 중인 서신, 메모 등 개인 소지품을 압수했다. 그의 사건 당일 알리바이 위장용 사진, 수사·재판에 대비해 다른 재소자와 문답 예행연습을 한 흔적 등 유의미한 증거물을 확보한 것.
 
검찰은 DNA를 통해 성폭행범이 김 씨인 만큼 살인사건의 진범(眞犯)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검찰의 주장은 재판 과정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피해 여고생의 어머니는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딸의 한(恨)을 풀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2016년 12월 5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형사합의11부 심리로 피해 여고생의 어머니 A씨에 대한 증인 신문이 열렸다. A씨는 “남편은 딸을 잊지 못하고 술만 마시고 지내다가 2009년 갑자기 죽었다. 딸이 죽은 이후 가족들은 힘들게 살아왔다. 딸의 한을 풀어 달라”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당부했다.
 
A씨는 “딸이 사건 당시(2001년 2월) 방학 중이었는데 항상 엄마 가게 일을 돕고 끝나면 함께 귀가했다. 사건 당일에는 개학이라고 먼저 집에 갔는데 들어오지 않아 경찰에 신고했다”고 당시 딸의 행적을 설명했다.
 
당시 딸이 생리 중이었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사건 이후에 알게 됐다”고 답변했다. 검찰은 당시 피해 여고생이 생리 중이었고, 생리혈과 정액이 섞이지 않아 성관계 후 곧바로 살해됐다며 피고인 김 씨가 성관계 후 곧바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월 17일 광주지검은 김 씨가 무기징역을 선고한 1심 판결에 불복, 항소했다고 밝혔다. 검찰도 이날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검찰 관계자는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고, 이후 반성조차 없다. 이미 무기수 신분이기 때문에 엄한 처벌을 위해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광주지법 형사합의11부는 같은 달 11일 김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와 2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죄질(罪質)이 나쁘고 범행(犯行)을 반성하지 않는 점, 유족들의 고통, 사회에서 격리하고 참회와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검찰은 2016년 12월 “시민 사회와 격리가 필요하고 극악한 범죄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며 김 씨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법원은 김 씨에게 2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광주고법 형사1부는 지난해 8월 31일 김 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과 같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지난해 12월 22일 대법원 1부는 김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 사건은 ‘태완이법’ 시행으로 살인죄 공소시효가 폐지된 뒤 유죄(有罪)가 선고된 첫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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