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의 유통그룹인 현대백화점이 할인점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11일 “농협과 제휴를 맺고 대형 할인점 사업에 뛰어들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현재 농협은 농산물 전문 할인업체인 ‘농협 하나로클럽’을 갖고 있다. 반면 현대백화점은 할인점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고급 백화점’에 승부를 걸어온 현대백화점과 ‘먹거리’를 주로 취급해온 농협이 서로 전략적 제휴를 맺게 된 것. 현대백화점은 이번 대형 할인점 사업을 계기로 유통업계의 절대 강자로 발돋움하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분위기다. 그런데 현대백화점이 이같은 사실을 발표하자 업계에서 ‘꿩 대신 닭을 선택한 것이냐’며 이번 결정에 대해 다소 빈정거리는 시각을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경쟁업체의 한 관계자는 “현대백화점이 오랫동안 추진했던 사업이 사실상 물 건너가자 서둘러 차선책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최선책’은 외국계 대형 할인점 마트인 까르푸와의 제휴를 빗대서 하는 말. 업계에서는 현대백화점이 이번에 할인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한 결정을 두고 비판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백화점이 갑작스럽게 할인점에 진출한 내막에는 오너인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과 연관이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대체 무슨 얘기일까. 정지선 부회장은 지난 2003년 1월 1일 재벌가 2세로서는 최초로 ‘총수’의 대열에 들어선 사람이다. 덕분에 그는 줄곧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다. 현재 경영일선에 뛰어든 재벌가 2, 3세들은 대부분 회사의 ‘상무’ 또는 ‘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다. 회장단에 해당하는 부회장의 직급을 가진 사람은 정 부회장이 유일하다. 하지만 정 부회장이 높은 직책을 맡은 것과 비교해볼 때, 그동안 현대백화점 내부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젊은 총수’가 회사의 경영을 맡을 경우, 신규사업에 뛰어드는 등 대대적인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는 것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그가 부회장에 오른 이후, 가시적인 효과는 지난 2003년 8월 현대백화점 부천 중동점을 연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그로서는 재벌 2세라는 한계를 넘어 경영자로서의 ‘첫 작품’을 보여줘야한다는 부담이 적잖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대백화점이 이번에 할인점 사업 진출을 선언한 것은 사실상 그의 첫 번째 시작이다. 현대백화점 내부에서도 신규사업 진출이 사실상 정 부회장의 작품이라는 데에는 인정하는 분위기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이번 할인점 사업 진출은 그룹기획조정본부의 주관하에 이뤄졌다”며 “기획조정본부는 정 부회장을 보필하기 위한 직속조직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에 농협과 계약을 한 주체는 그룹기획조정본부이지만, 정 부회장이 이번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는 얘기. 물론 그가 애시당초부터 농협과의 합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이번 일로 인해 별다른 구설수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가 ‘첫 작품’으로 내놓고 싶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는 데 있다. 업계에서는 이것은 까르푸와의 합작 성사라고 보는 분위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백화점이 할인점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서 그동안 까르푸와 협의를 지속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현대백화점 홍보실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까르푸로부터 먼저 전략적 제휴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며 “하지만 항간에서 얘기가 돌았듯이 회사를 M&A하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화점의 내부 관계자가 전하는 얘기는 조금 다르다. 백화점 내부의 한 관계자는 “까르푸와 구체적인 조건에 대해서 여러 얘기가 오간 것은 사실”이라며 “막판까지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무산됐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의 얘기에 따르면 현대백화점과 까르푸는 크게 두 가지에서 큰 입장차이를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백화점은 까르푸의 할인점 경영 노하우만을 배우길 원했으나, 까르푸는 양 사가 같은 비율로 새로운 법인을 설립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현대백화점과 까르푸가 사업 합작을 위해 투입하고자 하는 자금의 규모가 워낙 커, 사실상 조절이 불가능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 결국 현대백화점은 자금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일로 인해 정 부회장의 ‘첫 프로젝트 가동’이 완전히 무산됐다는 점. 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정 부회장은 다른 신규사업 보다도 할인점 사업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현대백화점의 입지는 다급해졌다. 이로인해 차선책으로 선택된 것이 농협과의 합작이 아니냐는 것. 실제로 현대백화점은 지난 2000년 농협이 ‘하나로클럽’을 출범시키던 당시에, 유통 사업과 관련해 컨설팅을 해준 적이 있었다. 결국 오랫동안 진행시켜온 프로젝트를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현대백화점의 상황과 농협의 사업 확대 욕구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비판이 오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백화점은 이에 대해 부인하고 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외부에서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이번 합작이 ‘최선’인지 ‘차선’이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정 부회장이 첫 번째 경영 시험대에 섰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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