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이 요즘 시끌벅적하다. 대한민국 최고 재벌그룹 오너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총수 오너들끼리 직접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 회장과 신 회장은 모두 국내 재계의 대표적 오너인데다, 조만간 ‘이웃사촌’이 될 예정이었다. 더구나 신 회장이 올해 한국 나이로 이른 넷, 이 회장이 예순 넷으로 나이가 많아 ‘고령의 점잖은 재벌 총수’들이 왜 싸움을 벌이느냐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용산구 이태원동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얘기인 즉슨 간단하다. 지난 2000년 들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현재 살고 있는 한남동 7XX번지를 떠나 새로 이사 갈만한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전낙원 전 파라다이스 회장이 소유했던 이태원 땅 135-XX번지가 이 회장의 눈에 쏙 들어왔다. 이 땅은 현재 이 회장이 거주하고 있는 한남동 자택과 삼성의 영빈관인 승지원과도 거리가 가까운데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조망권도 좋았다. 이 회장은 망설임 없이 이 땅을 사들였고, 집 공사를 시작했다. 이 땅에서 3~4m 떨어진 곳에는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집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웃사촌’이 될 예정이었던 신 회장이 느닷없이 공사를 중지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신 회장의 주장은 이 회장이 새 집을 지으면서 공사소음이 너무 심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창 새 집으로 이사 갈 꿈에 부풀어있던 이 회장으로서는 하루아침에 날벼락이 떨어진 셈이다.

이렇게되자 이 회장은 집 공사가 적법한 절차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목청을 높이고 나섰다. 그러나 여기서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신 회장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신 회장의 셋째 아들인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이 나섰다. 신 부회장은 지난 4일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우리는 지난 5년간 참을 만큼 참았다”며 “이 회장의 집 공사 때문에 잠을 못자는 것은 물론이고, 지하실에 물이 새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농심 신씨 일가는 “우리가 이사가야할 판”이라며 삼성가 이씨 집안을 비꼬고 나서기까지 했다.

결국 이건희 회장이 새로 이사 갈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옆 집에 먼저 둥지를 틀었던 신 회장이 이를 반대하며 옥신각신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집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소음, 먼지, 조망권 등이 두 집안 싸움의 불씨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농심 신씨 일가가 삼성 이씨 일가에 딴지를 걸고 나선 것은 오랜 앙금에서 불거진 감정 다툼 때문이라고 보는 분위기다. 재벌가 사람들에게 있어 집은 무척 민감한 사안 중 하나다. 한남동이나 성북동에 국내 재벌그룹 총수들이 대부분 둥지를 튼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우선 자기들만의 프라이버시가 철저히 지켜지기를 원하고, 또 일반인들과 휩싸여 사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성향이 있다. ‘재벌가 1번지’로 불리는 한남동 일가는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국내의 내로라하는 재벌그룹 총수들이 모여 살았다.

이건희 회장을 비롯,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박삼구 아시아나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구자학 아워홈 회장 등의 자택도 모두 여기에 있다. 이들은 이곳에 철저히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재벌가 1번지’인 한남동에서도 삼성그룹 이씨 일가는 터줏대감으로 통했다. 선대회장인 고 이병철 회장때부터 무려 30여년에 걸쳐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 본인 이외에도 누나 이숙희(고 이병철 회장의 둘째딸)씨,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사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버지 시대부터 지내온 한남동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남동이 ‘삼성가’ 사람들에게 터줏대감 자리라면, 한남동과 인접한 이태원은 ‘농심 신씨’ 일가의 텃밭이다.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이외에 신동원 농심 부회장, 삼남인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이 이태원에 둥지를 튼 지 어언 10년이 돼간다. 본인들로서는 이태원은 일종의 농심 ‘랜드마크’ 였던 셈이다. 이런 곳에 이건희 회장의 집이 들어선다니 농심으로서는 달가울 리는 없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시각. 더군다나 이 회장 일가는 이태원 135번지 일대의 땅을 모두 사들여 향후 출가한 두 딸인 이부진 신라호텔 상무와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 내외까지 근처에 함께 살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쯤되면 농심 신씨 일가로서는 뭔가 모르게 선점효과를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신 회장의 언짢은 기분이 이런 문제를 야기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건희 회장의 새 집이 하루하루 올라가면서, 신춘호 회장 집 마당 시야를 조금씩 가리기 시작한 것이 문제의 화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은 터에, 신 회장이 마당에서 한강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의 지붕 천장을 보게 생겼으니 여간 문제가 아닌 셈. 결국 몇 년 동안에 걸친 신씨 일가의 마음 속의 앙금이 결국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이 회장의 새 집 지붕을 보며 폭발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그러나 삼성그룹측은 어떤 이유에서든 이 문제는 더 이상 확대하고 싶어하지 않는 분위기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집 공사가 거의 끝난 상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 당황스럽다”며 “더이상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사상 유례없이 불거진 재벌가의 집터 싸움,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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