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전임자가 맺은 이란 핵합의 파기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미국이 이란 핵합의에서 탈퇴하면서 미국의 이런 결정이 북미정상회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일 오후 2시(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의 핵합의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며 이란 핵합의 탈퇴를 선언했다. 정식 명칭이 ‘포괄적 공동행동 계획(JCPOA)’인 이란 핵합의는 2015년 7월 이란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5개국에 독일을 더한 6개국(P5+1)과 도달한 합의를 말한다. 이란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미국 대통령은 국내법에 따라 90일마다 이란의 협정 준수 여부를 판정하고, 120일마다 대(對)이란 제재 유예 갱신 여부를 결정하도록 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JCPOA와 관련해 ▲2025년 10월 18일 모든 제재가 해제된다는 일몰(日沒)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 ▲탄도미사일도 규제해야 한다 ▲미국이 구체적으로 지목한 핵시설만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대상이었는데, 이란 전역에 대한 즉각적인 사찰을 허용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의 핵합의는 이란의 비핵화나 테러리즘 지원 활동을 억제하는 데 실패했다”며 미국이 이란 핵합의에서 탈퇴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란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며 “미국은 이란에 고강도 제재를 재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로써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이란과 체결된 핵합의는 3년 만에 존폐 위기를 맞게 됐다. 협상 전체 과정을 주도했던 미국이 이탈해 동력을 상실한 데다 미국 정부가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재개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는 이란이 핵개발을 중단하는 대신 대이란 경제 제재를 해제한다는 합의안의 골격을 파괴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발표에 따라 미 백악관은 대이란 제재 유예를 연장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조만간 의회에 통보할 방침이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제재 유예를 연장하며 “마지막 기회”라고 밝힌 바 있다. 당사자인 이란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을 비판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국영TV를 통해 “이란은 핵합의에 남아 미국을 제외한 다른 협정국들과 협력하겠다”며 “미국은 핵합의에서 탈퇴하면서 국제조약을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 미국의 이탈을 막고자 했던 프랑스·영국·독일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들 서방국은 이란 핵합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미국과 물밑 접촉해 왔다. 하지만 미국의 탈퇴로 핵합의가 사실상 파기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이들의 노력도 물거품이 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탈퇴 발표 직후 트위터를 통해 “프랑스는 이란 핵합의에 따라 계속 활동할 것”이라며 “미국의 탈퇴로 핵무기 비확산 체제가 위태로운 상태”라고 우려했다. 버락 오바마 전임 행정부에서 체결한 협정을 3년 만에 후임자가 뒤집으면서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는 손상될 전망이다. ‘핵폐기’가 거론될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협상력이 저하되리라는 우려도 나온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탈퇴 결정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며 나머지 협정국은 이란 핵합의에 남아달라고 촉구했다. 반면 이란과 앙숙인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용기 있고 올바른 결단을 했다”며 미국의 결정을 환영했다.

미국이 JCPOA 탈퇴를 결정한 국면에서 이란이 앞으로 나머지 5개국을 상대로 핵합의를 성실히 지킬지 여부가 관심사다. 미국이 핵합의 탈퇴를 선언하면서 이란은 핵 활동을 빠른 속도로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전문가들은 그 속도와 시기에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란의 핵무기 제조까지 몇 년이 걸릴 거라는 분석을 내놓지만, 1년을 조금 넘는 기간이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고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핵합의를 탈퇴하더라도 이란이 핵활동을 확대하거나 국제사찰단을 추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과의 무역관계 유지를 바라는 이란에 노골적인 핵활동 재개는 이를 즉각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이뤄진다 하더라도, 이란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위험은 마찬가지다. 

트럼프 대통령의 JCPOA 탈퇴 강행은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강경한 입장을 북한에 과시하는 의미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미국외교협회(CFR)의 로리 에스포시토 머레이 선임 연구원은 지난 8일 일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이번 결정이 북한과의 협상을 놓고 미국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오늘 탈퇴 발표를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미국이 단순히 이란만이 아니라 북한 김정은과의 회담에 대해 강한 위상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라며 북한과 불충분한 합의는 수용할 수 없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트럼프가 탄도미사일 개발과 일몰 조항을 이란 핵합의 탈퇴 이유로 내세웠다는 점은 그가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비핵화와 더불어 탄도미사일 폐기, 일몰 조항 비(非)설정까지 요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AC)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 파기를 통해 북한 정권에 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 그가 얼마나 강경해질 수 있는지 과시하려 한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반대 의견도 있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로버트 아인혼 연구원은 “이란 핵합의 파기는 김정은에게 미국과의 협상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며 “이렇게 되면 김정은이 중요한 양보를 해야 할 유인(誘因)도 줄어든다”고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에 말했다.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연구원은 “트럼프 행정부는 성공을 위한 매우 높은 기준을 설정했다. JCPOA 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협상에 대해서도 매우 강경한 입장을 세워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셈”이라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