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고려의 백성들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이 슬픈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원나라에 소환되는 충선왕과 다시 왕위에 오르는 충렬왕은 권력교체의 비정한 장면을 연출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이야기가 고려의 현실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아아, 충선왕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원나라로 압송된다는 말인가!”
“원나라의 횡포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도대체 원나라가 무엇인데 고려 왕을 제 마음대로 바꾼단 말인가!”
운집한 군중들 사이에서는 관원들의 눈을 피해 들릴까 말까 하는 볼멘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왔다. 그것은 원나라의 전횡을 비판하며 고려 조정의 무능을 한탄하는 말 못하는 민초들의 애끓는 항변이었다. 
떠나가는 충선왕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다보는 군중들 속에는 권부(權溥) 학당의 문하생들도 끼여 있었다. 동문수학하는 13살의 동갑내기 소년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안축(安軸), 최해(崔瀣)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영리한 13살의 학동들은 백성들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난형난제(難兄難弟)와 같은 천재 소년 4인의 예리한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와 원망으로 일그러진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충선왕의 호송행렬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현은 또래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크고 이마가 훤하고 이목구비가 정연했다. 의젓한 기상은 어른 같았고, 부처님의 귀를 닮고 손이 무릎 위에까지 다다라서 주위에서 다들 유비(劉備)를 닮았다고 했다. 다른 세 소년들 역시 각각 이제현 못지않은 자부심과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학문에 정진하는 인재들이었다. 
이제현이 호기심에 가득한 모습으로 스승인 권부(權溥)에게 물었다.
“스승님, 금상께서 무슨 죄를 지었기에 즉위한지 반년 만에 저리도 참담한 지경이 되었사옵니까?”
“이번 사건은 처음엔 계국대장공주의 조비(趙妃)에 대한 투총(妬寵)에서 비롯되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충렬·충선 두 왕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결과이다. 금상(충선왕)의 개혁정치를 좌절시키려는 선왕(충렬왕)의 지지 세력들이 선왕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지.” 
“금상의 폐위가 원나라에 무슨 이익이 있사옵니까?”
“금상이 즉위하여 고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문신의 힘을 키우려고 한 일련의 개혁안을 원나라가 반대한 것이야. 원나라는 충선왕이 개혁적 조치를 단행하는데 대해 불안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선왕(충렬왕)이 이전대로 고려를 통치하길 바라고 있단다.”
그제야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이제현은 다시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앞으로 우리 조정은 어떻게 되는 것이옵니까?”
“이번 조비무고사건으로 금상이 퇴위했기 때문에 앞으로 상당 기간은 개혁적인 정사를 펴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후 원나라는 우리 고려에 대해 한층 더 간섭을 강화할 것이고…….”
어린 제자의 조숙한 물음에 스승 권부는 자상하게 설명하여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 것이다.
충선왕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으로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다. 어릴 때 이름은 왕원(王)이고 몽골 이름은 익지례보화(益智禮普化, 젊은 황소라는 뜻)이다. 원래 셋째 아들은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충선왕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쿠빌라이의 막내딸이었기에 세자가 될 수 있었다. 
제국대장공주는 혈통상 ‘황금씨족’이라고 불린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그녀는 고려에 시집올 때 중앙아시아의 상단과 위사(衛士), 통역사, 노비 등을 데리고 왔다. 그녀가 고려에 와서 몽골어를 쓰고 몽골 풍속을 그대로 따르는 바람에 고려 왕실에는 몽골의 언어와 풍속이 만연하게 되었다. 자신의 아내를 가리키는 ‘마누라’, 황제나 귀족의 아들에게만 붙이는 갓난애란 뜻의 높임말을 가리키는 ‘아기’, 시집 안 간 처녀에 대한 경어를 가리키는 ‘아가씨’ 등이 바로 몽골식 궁중어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제국대장공주는 몽골이 남송을 점령하여 세계 최대 시장을 확보하자(1279년), 그의 상단(대표자는 당흑시)을 시켜 고려의 인삼을 대량 수집해 남중국에 비싸게 팔았다. 이후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고려로 몰려오고, 고려의 인삼, 모시, 종이 등이 중국과 러시아, 중동으로 팔려나갔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1277년(충렬왕3) 세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된 왕원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고려사》에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1283년(충렬왕9) 2월. 왕원이 아홉 살 때였다. 부왕인 충렬왕이 충청도 방면으로 사냥을 나가려고 하자 왕원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에 유모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에 허덕이고 농사철이 닥쳐왔는데, 아바마마께서는 어찌하여 날마다 사냥을 떠나려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왕원이 어느 날 해진 베옷을 입은 사람이 땔나무를 지고 궁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마음 아파하기도 하였다.  
“나는 좋은 의복을 입고 있는데 백성들의 살림이 오죽하면 저리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다닐꼬.”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일찍이 천일(天一)이라는 관상 보는 사람이 왕원의 관상을 보고 말했다.
“인자스러운 눈매는 매나 사냥개를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왕원이 곁에 있던 시종 박의(朴義)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매양 아바마마께 매사냥을 권유하는 놈이 바로 이 늙은 개로다.” 
천일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물러났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세자 왕원이 원나라에 숙위할 때 쿠빌라이 황제가 자신이 총애하는 외손자를 침전(寢殿)으로 불러들여 물었다.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
“《통감(通鑑)》을 읽고 있사옵니다.”
“중국의 역대 제왕들 중에서 누가 제일 현명하더냐?”
“한 고조와 당 태종이라고 생각하옵니다.”
“그러면 한 고조와 당 태종이 짐(朕)과 비교하면 어떠하냐?”
“소손(小孫)이 아직 나이가 어리니 어찌 알겠사옵니까?”
쿠빌라이는 외손자의 영특함에 기뻐하며 늘 마음 든든하게 생각했다.
제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충렬왕의 양위
1292년(충렬왕18). 왕원은 18살 때 조인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4년 후(1296년 11월)인 22살 때 연경의 황궁에서 원나라 쿠빌라이의 증손녀이자,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剌)의 딸인 계국대장공주(國大長公主, 몽골명 寶塔實憐보탑실련)와 혼인했다. 
왕원은 황제와 황태후, 그리고 장인인 진왕 감마라에게 결혼 예물로 각각 백마 81필을 바쳤다. 고려의 악관(樂官)은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 ‘감황은(感皇恩)’을 연주했다. 황태후와 진왕 감마라는 돌아가면서 수백 마리의 양과 수백 독의 술을 내어 신랑신부에게 잔치를 열어주었다. 3~4일 간격으로 거듭 열린 연회는 해를 넘겨 약 석 달간 계속되었다. 
1297년(충렬왕23) 5월.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가 병이 들자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연비(燃臂, 팔꿈치를 태우는 기도 축원)를 하고 헌성사에 가서 쌀 1백 석을 내어 빈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공주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39세였다. 부고를 받은 세자 왕원은 그해 6월 원나라로부터 분상(奔喪, 외지에서 부모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감)하여 와서 모후의 영전에 분향했다.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충렬왕은 원나라에서 입지가 약해졌고, 대신 원나라 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세자 왕원이 고려의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충렬왕을 버리고 세자에게 몰려들었음은 권력의 속성이고 염량세태(炎凉世態)였던 것이다. 
조정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충렬왕이 총애하던 궁인 무비(無比)를 모함했다.
“공주마마께서 돌아가신 것은 사악한 무비가 저주했기 때문이옵니다.” 
세자 왕원은 부왕을 심하게 몰아세웠다.
“아바마마께서는 어머니가 병이 생기게 된 까닭을 정녕 모르시옵니까? 이는 사랑을 받고자 질투하는 것들 때문이니 이들을 문초하시옵소서.”
한 달 후, 왕원은 무비를 체포하여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한 사실’을 문초한 후 처형했다. 또한 충렬왕의 심복인 내시 도성기, 최세연,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을 죽인 뒤에 부왕의 측근 40여 명을 숙청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이때의 상황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백하여 차츰 저주한 사실이 드러나서 모두 목을 베니 나라사람들이 무서워서 떨었다.”
충렬왕은 세자 왕원의 지나친 처사와 제국대장공주와 무비의 연속적인 죽음에 크게 충격을 받아 이듬해 왕위를 내놓고 태상왕으로 물러났다. 원나라는 죽은 제국대장공주의 남편보다 그녀의 아들을 택한 것이다.
무술년(1298, 충렬왕24) 정월 21일. 세자 왕원이 24세의 젊은 나이로 고려 제 26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충선왕(忠宣王)이다. 고려의 ‘충(忠)’자 돌림의 왕들은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후대의 사람들에게 괜찮은 평가를 받는 왕이 충선왕이다. 다른 왕들과 달리 고려의 위기를 자각한 충선왕은 정국의 쇄신을 꾀하기 위해 정치와 사회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취임일 새벽을 기하여 이전에 범한 참형과 교형 이외의 죄는 모두 용서해줬다.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詞林院)의 사학사(四學士)가 인사행정을 관장하도록 했다. 충렬왕대에 권력을 잡았던 천민 출신 관료들을 배제하고, 승려의 직분을 새롭게 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소외된 선비들을 등용하여 문신의 힘을 키우고자 했다. 그리하여 삼척현에 은거하고 있던 이승휴(李承休), 14년간 관직을 버리고 한거(閑居)하고 있던 채홍철(蔡洪哲)이 다시 조정에 나왔다. 원나라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이 침입했을 때 목숨을 걸고 싸운 방호별감 복규(卜奎)와 원주별초 소속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 등에게 상을 내리고 원주 백성들에게도 부역과 각종 공물을 3년간 면제해 줬다. 공신전을 소유하였던 집으로서 자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점유를 당한 것은 연한에 관계없이 그 자손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세도가에 빌붙거나 원나라에 아부하여 벼슬을 얻은 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뇌물거래와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세력가들이 농지를 탈취하고 노비를 빼앗는 것을 금지했다. 
이같은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가히 혁명적이어서 부원배(附元輩)나 권문세족 등 기득권 세력들의 큰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부원배의 행위는 후일 일제 강점기 친일부역자로 활동했던 친일파의 행각과 다름이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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