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아베 총리 횡설수설 화법에 비판 일어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일본 야당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묻는다. “가케(加計)학원의 가케 고타로 이사장을 2015년 2월 25일 면담했는가?” 이에 아베 총리가 대답한다. “신문에 실린 ‘총리 동정’에 고타로 이사장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국회의원이 또 묻는다. “모리토모(森友)학원 가고이케 야스노리 전 이사장이 ‘좋은 땅이니 이대로 추진하면 되겠다’는 아키에 여사의 메시지를 긴키(近畿) 재무국에 전달했다는데?” 아베 총리가 대답한다. “가고이케 이사장이 여러 차례 아내 전화에 메시지를 남겼지만, (녹음) 테이프가 남아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사학재단 모리토모학원의 국유지 헐값 매입에 부인 아키에 여사가 개입했다는 의혹, 아베 총리의 오랜 친구가 이사장인 가케학원의 수의학부 신설에 아베 총리가 관여했다는 의심 등으로 연일 야당의 공격을 받는 아베 총리의 특이한 화법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아사히신문·도쿄신문 등 일본 언론의 29일 보도에 따르면 국회 대정부질의 시간이나 기자회견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을 받았을 때 논점을 교묘히 바꿔 모호하게 피해 가는 아베 총리의 답변이 인터넷에서 ‘총리의 밥 논법(ご飯論法)’으로 불리고 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고항논뽀’인 ‘밥 논법’은 노동 문제에 정통한 호세이대학 우에니시 미쓰코 교수가 최근 트위터에 소개하며 유명해진 말이다. “밥은 먹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식사를 했느냐’는 의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질문의 ‘밥’에만 초점을 맞춰 “(빵을 먹었으니 밥은) 안 먹었다”고 답하는 방식이 밥 논법이다. 모리토모·가케 관련 추궁에 대응하는 아베 총리의 답변 역시 질문의 논점을 흩뜨려 자기에게 유리한 측면만 부각하는 ‘밥 논법’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고 일본 언론은 지적한다.

아베 총리 지지도를 끌어내리며 1년 넘게 그를 괴롭히고 있는 이른바 ‘사학(私學) 스캔들’은 지난해 1월 불거졌다. 일본 정부가 가케학원이라는 지방 사학법인에 50년 넘게 어느 학교에도 안 내주던 '수의학부 신설 허가'를 내줬다. 그런데 그 학원 이사장이 아베의 30년 지기(知己)였다. 아베가 이 사람과 밥 먹고 골프 친 횟수가 2012년 재집권 이후에만 열다섯 번쯤 된다. 가족·각료·참모·정치인 빼고 아베와 이 정도로 만난 사람은 손에 꼽는다. 허가가 난 지 세 달 뒤, 아사히신문이 "정권 실세들이 문부과학성 관리들을 불러 허가를 내주라고 압박했다"는 특종을 터트렸다. 그때부터 1년 넘게 굴러온 특혜 시비가 최근엔 좀 수그러드는 듯했다. 아베 총리가 지난해 10월 총선에 압승해 야당 기세가 꺾인 데다, 같은 일을 파고드는 기사가 1년 넘게 거의 매일 나오니 일본 국민도 물린 측면이 있다. 바로 이때 '정치적 폭탄'이 새로 터졌다. 문제의 수의학부가 들어선 에히메(愛媛)현 공무원들이 3년 전에 작성한 내부 공문 여러 건을 지난 21일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에히메현은 가케학원과 손잡고 지역부흥 차원에서 수의학부 신설을 숙원사업으로 수 년간 추진해 온 지자체다. 이곳 공무원들이 2015년 3~4월 사업 추진과정을 기록할 목적으로 가케학원 직원들에게 들은 얘기와 자기네가 총리 비서를 만나서 나눈 얘기를 정리한 공문이다. 가케학원 이사장이 2015년 2월 총리관저에서 아베와 면담한 내용도 소상히 적혀 있다. 이사장이 아베에게 "국제 수준의 수의학부를 짓고 싶다"고 하자, 아베가 "새로운 생각 좋다"고 화답했다는 내용은 물론 '면담 시간 15분'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아베와 이사장이 회식할 때 총리가 총리 비서에게 "잘 알아보라"고 했다는 내용, 이후 총리 비서를 만나러 상경한 현청(縣廳) 직원들의 실명과 직함도 있다. 

이튿날 국회에서 야당이 총리에게 "공문 내용이 사실이냐"고 추궁했다. 결정적인 장면은 이 대목에서다. 총리가 "(가케학원 이사장과 면담했다는 총리실) 기록도 없고 기억도 없다"고 했다. 모호하게 얼버무리지 않고 딱 부러지게 전면 부인했다. 28일 야당 의원들이 다시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21일 질문의 재판(再版)이었다. 그러자 같은 질문에 짜증이 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아베 총리가 ‘밥 논법’을 끌어다 답변했고, 이에 일본 언론이 ‘총리의 밥 논법’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밥 논법’이라는 말을 만든 우에니시 교수는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밥 논법’이란 표현을 통해 국회 질의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국회가 총리의 스캔들만 다룬다는 비판도 있지만, 진짜 비겁한 것은 이런 답변으로 국회와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라고 비판했다. 사학 스캔들의 진실을 파헤친다며 야당이 아베 총리를 집요하게 추궁하고 있지만 이 사안을 둘러싼 상황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지배적인 여론은 야당과 총리 둘 다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야당은 똑 부러지는 증거 제시 없이 의혹만 부각하고 있으며, 아베 총리는 야당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의혹을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일본 오사카시에서 쓰카모토유치원을 운영하는 사학법인 모리토모학원은 초등학교 설립을 위해 지난해 6월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에 있는 국유지를 1억3400만 엔(약 13억4700만 원)에 사들였다. 이는 감정가 9억5600만 엔(약 96억1200만 원)의 14%에 불과한 액수였다. 실제로 도요나카시는 지난 2010년 이 부지의 동쪽에 있는 땅 9492㎡를 10배 비싼 14억2380만 엔에 사들였다. 모리토모학원의 당시 이사장은 아베 총리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거대 우익 단체 일본회의의 임원으로 아베 총리, 그리고 아키에 여사와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부지 매입 후 모리토모학원은 초등학교 명예 교장으로 아키에 여사를 위촉했고 이후 일본 신문에는 국유지 헐값 매각, 학교 설립 허가에 대한 일본 재무성의 편의 제공을 주제로 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야당 등은 매각 과정에 정권 차원의 특혜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아베 총리는 “나와 아내가 관계가 있다면 총리도, 국회의원도 모두 그만두겠다”며 강하게 부정해 왔다. 가케학원 수의학부 신설을 둘러싼 의혹은 가케학원이 수의학부 신설 허가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 핵심인데, 공교롭게도 가케학원 계열 유치원 명예원장이 아키에 여사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제2의 모리토모 사건’으로 불리게 됐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