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의 재기가 가능한가’.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공개석상에서 “결자해지 차원에서 한보철강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 전회장은 지난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97년 부도 이후 아직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보철강을 본인에게 다시 맡겨 달라”며 한보철강 인수의욕을 불태웠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정 회장의 한보철강 인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밝히고 있어, 그의 ‘재기의 꿈’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IMF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됐던 한보철강의 부도. 당시 한보의 총수였던 정태수 전 회장은 ‘권력형 금융부정 및 특혜 대출비리’등으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아야 했다.정 회장은 비자금 사건과 관련, 97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6년간 옥고를 치른 뒤 지난 200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의 석방 사유는 대장암 진단과 함께 “수감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몸 상태가 안 좋다”는 의사 소견서 때문.하지만 최근 검찰이 ‘당시 의사가 금품을 받고, 석방에 필요한 진단서와 소견서를 부풀려 작성했다’는 혐의를 포착하기도 했다.이처럼 숱한 화제거리를 낳았던 정 전회장이 최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0일 기자회견을 자청, “한보철강을 인수, 재기에 나서겠다”고 공언한 것이다.그는 기자회견에서 “한보철강의 부도로 고통을 겪고 있는 채권자들과 국민들께 사과드린다”며 “남아 있는 여생 동안 보상해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고 찾다가 이번 한보철강 인수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실제로 출소 후 대장암 수술을 받고 회복한 뒤 재기를 향한 강한 집념을 보여 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치동 옛 한보그룹 사무실에 출근, 한보철강 인수를 위한 준비 상황을 점검하는 등 재기의 의지를 불태웠다는 것이다.그러나 정 전회장은 지난달 한보철강 매각을 위한 입찰에 참가했지만, 거부당했다. ‘부도기업의 임원 등 특수관계인들은 입찰에 참여할 수 없다’는 파산법 221조 조항 때문이다. 이에 정 전회장은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6조 1000억원에 달하는 한보철강의 부채를 모두 상환하겠다”며 인수 참여를 허용해 줄 것을 호소하고 나섰다. 정 전회장의 부채 상환 계획은 우선 3개월 내에 아랍계 금융기관으로부터 4억5000만불의 외자를 유치, 일부를 상환한다는 것이다.

또 정 전회장은 “인천 서구와 용인 신갈, 안산 등에 보유한 토지에 아파트를 건설한 뒤 공사이익금과 토지대금 회수분으로 3년 내에 추가로 1조원을 갚을 것”이라며 “나머지 부채 4조 6000억원은 16년간 한보철강에서 나온 수익으로 매년 3,000억원씩 갚아 나가겠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3년간 5억달러를 수출선수금조로 차입해 B지구를 2년안에 완공하겠다고 설명했다.이런 계획에 대해 기자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한보철강 부지선정이나 조성과정에서 열과 성을 다했다. 나 보다 더 한보철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며 “한보철강을 재건할 수 있는 사람은 정태수 뿐. 또 이런 계획으로 한보철강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그는 파산법 등 법적인 문제로 인수가 불가능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해법을 내놓았다.

그는 “채권자들이 법정관리를 취소하고 채권 일부를 출자전환한 뒤 주식을 양도받으면 파산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며 “채권자의 입장에서는 채권을 비싸게 많이 회수할 수 있는 매수자가 있다면 당연히 팔지 않겠느냐”고 말했다.정 전회장은 이어 “1대 채권자인 자산관리공사에 이런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자산관리공사가 부정적인 답을 내놓아도 다른 채권자들을 만나 차근차근 설득해 나갈 것”이라며 “한보철강을 제일 잘 알고 있는 내게 정상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특히 정 전회장은 한보철강의 부도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정 전회장은 “한보철강 당진제철소가 전체공정의 90%까지 이뤄져 공장의 완공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당시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이 때 야당 국회의원 후보가 ‘당진제철소는 정태수 것이 아니고 김영삼 대통령 것’이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됐다”며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이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도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정 전회장의 ‘한보철강 인수 계획’에 대해 채권자와 업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번 인수 계획을 보면 사실상 자신의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한보철강을 인수하겠다는 주장이어서 실현여부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업계 관계자는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됐던 한보철강 부도에 옛 사주가 차입금을 조달해 이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또 정 전회장이 내놓은 계획은 거의 실현 불가능하다”고 밝혔다.한보철강 인수전에는 현재 ‘포스코-동국제강’·‘INI스틸-현대하이스코’컨소시엄 등 10여개 업체가 참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보그룹은… 97년 부도로 외환위기 단초

지난 97년 1월 재계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이 부도, 재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한보의 부도와 관련,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국가 경제가 휘청거렸다. 결국 한보의 부도는 외환위기의 단초가 됐다. 당시 한보의 부실 대출 규모는 5조 7,000여억원으로, 건국 후 최대 금융부정 사건으로 기록됐다. 정태수 당시 한보 회장은 이런 천문학적 금액을 대출하는 과정에서 정계와 관계, 금융계의 인사들에게 무차별 로비를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또 한보는 은행의 대출금으로 18개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하는 등 계속해서 사업을 확대한 것으로 드러나, 한국 기업의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한보사건으로 정 전회장은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징역 5∼20년을 선고받았다. 이와 함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과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운영차장 김기섭 등 정권 실세들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함께 당시 ‘정태수 리스트’얘기가 공공연히 돌면서,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 더 있을 것이란 추측이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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