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김일성, 80년대 “韓·美·日 3각 군사동맹” 가능성 경계심 표출
북·중 관계, “입술과 혀의 관계”로 묘사됐으나 6.25전쟁 중 갈등

 
6.25전쟁 68주년이 다가왔다. 과거 북핵(北核) 위기가 지속된 상황을 감안해 볼 때, 2005년 6월 한 언론사가 입수한 기록물이 있었다. 미(美) 우드로 윌슨센터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가 옛 소련과 동구권, 중국 등 과거 공산권에서 수집, 분석연구했던 각종 기록 가운데 북한(北韓) 관련 기록을 모은 “뉴 에비던스(New Evidence)”였다.
 
뉴 에비던스의 주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CWIHP의 한반도 담당 캐스린 웨더스비 연구원은 2005년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당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사고방식을 분석하기 위해 수십 년 전 아이젠하워 행정부 기록을 볼 필요는 없지만, 북한은 그동안 김일성(金日成) 부자에 의해서만 통치돼 왔으며, 이들 기록은 놀라울 정도의 부자(父子) 정권 간 지속성을 보여준다”고 폐쇄사회인 북한의 행태 분석과 예측을 위해 비밀 해제된 북한 관련 과거 기록을 들여다볼 필요성을 강조했다.
 
CWIHP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소장 한국전쟁 관련 기록 약 200건을 한국 측에 넘겨주긴 했으나, 이 문서들은 편집된 것이고 원전은 아니라며, 냉전 후 빛을 보기 시작한 북한 관련 기록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 단계라고 지적했다.
 
북한 김일성(金日成) 주석은 막역한 친분관계를 맺은 동독(東獨)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과 3차례 정상회담마다 북한 내부의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는 등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특히 1984년 김일성이 동독을 방문, 2번째 가진 정상회담에선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이탈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 말해 당시 개방·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중국의 변화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와 관련, 김일성은 “인구 10억인” 중국(中國)과 무력충돌 위기가 1969년 있었던 사실도 설명하면서 “우리의 처지 때문에 참아야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80년대 “미국, 일본, 한국의 3각 군사동맹”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도 표출하면서 이를 막기 위한 “대일 협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핵과 미사일 문제를 갖고 세계와 대결함으로써, 중국으로 하여금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서 때때로 자본주의 국가들 편에 서도록 만들고 있고, 일본(日本)에 대해선 미국과 미사일방어체제(MD) 및 확산방지구상(PSI)에 적극 협력토록 만듦으로써 아버지가 가장 경계한 대외 관계를 자초한 셈이었다.
 
그러나 우드로 윌슨센터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의 한반도 담당 캐스린 웨더스비 연구원은 동구권의 각종 외교문서에 나타난 기록을 바탕으로 김일성도 궁극적으로는 중국과 소련을 못믿어 체제보장을 위해 독자적 억지력으로 핵무기를 추구했으며, 그게 김정일로도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소련, 중국, 동구권 외교문서에서 나타난 북한과 중국의 혈맹(血盟)관계 이면의 북한의 대중 갈등과 의심·불신은 당시 핵(核) 문제와 관련,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외부에서 보는 만큼 크지 않다는 중국과 미국 일부 전문가들 주장과 상통하는 면도 있었다.
 
대중 관계는 80년대 사회주의 이탈 우려
 
(1984년 5월 31일 김일성과 호네커 간 회담 동독 측 속기록. 호네커가 중국 정세에 관해 물은 데 대한 김일성의 답변) 호요방이 5월 북한을 방문했다. 오랜 친구인 등소평이 1982년 4월 나의 70회 생일 때 비공식 방문해 호요방을 신임 당 총서기라며 소개했다. 첫인상이 좋았다.
 
호요방은 (1982년 방북 때) 중국은 진정 소련과 관계개선 의사가 있다며 소련 지도부에 전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도 이 점을 재확인했다. 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에게 중국이 전쟁을 원치 않으며, 경제에 대한 문화혁명의 영향을 극복하는 데 모든 자원을 쏟아야 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대미 관계개선은 소련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이미 모택동과 주은래도 대미 국교 수립 때 나에게 말했다. 그들은 일본 및 미국과 만날 때마다 유일한 목적은 발전된 기술과 자금을 빌리기 위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왜 저 중요한 중국 시장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넘겨주나.
 
중국을 자본주의 국가들에 맡겨두면 중국이 다시 유사 식민지가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중국과 접경하고 있고, 미국 및 일본과 대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를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이 계속 사회주의 길을 계속 따르도록 해줘야 한다.
 
6.25 때 합동사령부 지휘권 갈등
 
북·중관계가 “입술과 혀의 관계”로 묘사돼 왔으나 실제론 6.25전쟁 중에도 갈등이 고조됐었다. 중국은 대북(對北) 지원 용의가 있었으나 북한이 유엔군의 38선 돌파로 어쩔 수 없게 될 때까지 안 받아들이려 한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4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도 받으라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5월 베이징을 비밀 방문, 남침 계획을 설명했으나 모택동의 북한 접경지 중국군 배치, 무기와 탄약 제공 등의 제의에 사의를 표시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은 6월 25일 남침(南侵) 개시를 중국에 사전 통보하지 않아 중국측은 외신을 통해 알았고, 북한은 중국 대사에게 전황 정보를 차단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중국이 다시 지원을 제안하자 북한은 소련의 재촉을 받고도 한참 후인 9월 28일에야 정치국회의를 열어 수용했다.
 
중국군이 참전한 후에도 북한은 중국과 합동사령부 지휘권을 놓고 과거 중국에 대한 조공국으로서 오랜 역사를 의식, 주권에 대한 우려 때문에 중국 측과 갈등을 빚다가 소련의 개입 후에야 타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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