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앞을 내다보지 못한 식언인가, 말실수인가. 김정태 국민은행장의 신중치 못한 말 한마디에 은행권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신용불량자 구제책과 관련, 김정태 행장은 작년 10월말 국민-주택은행 통합 창립 2주년을 맞이한 기자간담회에서 “신용불량자에 대한 원금 탕감은 절대 없다”며 “은행돈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겠다”고 했다가 한 달도 채 안된 지난해 11월 중순경 국민은행은 원금 탕감까지 포함한 신불자 구제책을 지난해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한 달 전 자신의 발언을 정반대로 뒤집은 셈이다. 은행권은 김 행장의 발언이 신중치 못했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비록 한 달이라는 한시적 운영이지만 신불자 구제와 관련해 원금까지 탕감해주는 은행이 전무했다는 점에서 국민은행의 신불자 원금탕감 정책은 금융권에서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정태 행장이 말을 바꿔가면서 파격적인 정책을 단행한 이유는 뭘까. 국민은행이 원금탕감까지 포함한 대대적인 신용불량자 구제책을 실시한 까닭은 급증하는 연체율을 잡고 실익도 챙기자는 속셈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한해 국민은행의 실적은 급등하는 연체율을 잡지 못해 적자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김 행장은 신년사에서 늘어나는 연체율과 전쟁을 벌였지만 적자를 보게 됐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국민은행이 신불자 구제와 적자폭을 줄이기 위한 고육책으로 원금 탕감을 결정했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즉 신불자들의 부실채권을 자산관리공사 등에 매각해 봐야 원리금의 20%도 못 받는 선택을 하느니, 신불자들의 원리금 감면 등으로 회수율을 높이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국민은행의 이런 조치가 채무자들에게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켜 타 은행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채무자들이 ‘버티면 원금보다 적게 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어 타은행의 대출금 상환을 늦추려고 한다는 우려다. 또 타 은행은 채무자들로부터 국민은행과 같은 조건으로 채무탕감을 해달라는 압력에 놓일 가능성도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국민은행의 채무탕감 조치는 은행권의 불만을 사고 있다. 이와 관련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가장 많은 카드고객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은행이 원금감면에 나선다면 우리 고객들 역시 감면 요구가 높아질 것”이라며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원금감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는 사태가 우려된다”고 말하며 국민은행의 행태를 꼬집었다.

한편, 국민은행이 한시적 운영을 위해 마련한 ‘특별신용회복지원방안’에 따르면, 본인 및 보증인을 통해 회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는 채무자 및 상환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채무자는 감면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하고 있어 사실상 도저히 갚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연체자를 대상으로 회수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받아내고 나머지는 포기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민은행은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 해 11월초부터 개인자산이나 일정한 소득원이 있는 연체자에 대해서는 원금의 20%까지 감면하고 잔액은 연이자가 6~7%인 장기저리대출로 전환하는 한편 상환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채무자에 대해서는 최대 총채권액의 50%까지 감면해주는 파격적인 내용의 신불자 구제책을 실시했다.

국민은행의 대출금이나 카드빚을 4개월 이상 연체한 고객들이 채권액의 60%를 상환할 경우 잔여채권은 감면처리 해준 것이다. 다만 상각처리되지 않은 일반채권에 대해서는 원금의 80%이상 상환해야 감면혜택이 부여됐다. 이어 총채권액의 10%~60%미만 상환시에는 일부 잔액은 감면하고 나머지는 장기분할상환대출로 전환해줬다. 이와 함께 국민은행을 포함해 4개 이상 금융기관에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다중채무자에 대해서는 2~3개월 연체한 경우 총채권액의 80%이상 상환하면 잔액을 감면해주고 4개월 이상 연체한 채무자는 총채권액의 60%, 원금의 70%를 상환할 경우 잔액을 전액 감면했다. 즉 4개월 이상 연체금액 1,000만원인 다중채무자가 600만원만 상환하면 차액 400만원에 대해서는 연체이자는 물론 원금까지 전액 탕감해 주기로 한 셈이다.

다만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거나 국민은행에 예,적금을 가지고 있는 자 등 본인 또는 보증인을 통해 채권회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는 채무자는 감면대상에서 제외됐다.국민은행은 원금탕감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기준으로 ‘자산 및 소득이 전무해 상환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자’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이와 관련 추가로 세부적인 기준을 마련해 적용했다. 국민은행측은 “감면대상은 사망했거나 이민 등으로 주변 친인척에 의한 대위변제마저 불가능해 사실상 상환능력이 없는 채무자에 한정하고 있는 만큼 ‘원금감면불가’원칙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국민은행이 이같은 내용의 채무 탕감을 실시하는 바람에 다른 은행들은 채무자들로부터 채무 탕감 압박에 직면해 있다는 게 금융권의 공통된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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