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금강고려화학(KCC) 정상영 명예회장이 모처럼 작심하고 입을 열었다.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조카인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정 명예회장은 분쟁 초기부터 비난 여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침묵을 지켜왔다. 그러나 최근 현대엘리베이터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내며 발표한 ‘석명서’에서 그동안 가슴에 쌓아왔던 숨은 얘기들을 공개했다. 정 명예회장이 공개한 비화와 새롭게 알려진 사실들을 짚어봤다.‘석명서’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을 설명하여 밝히는 글, 오해나 비난 따위에 대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석명서는 후자의 성격이 짙다.

그동안 정 명예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직후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현정은 회장과 대립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시숙으로서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어왔다. 표면적으로 보면 누가 봐도 비난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정 명예회장은 최대한 말을 아껴온 게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여론은 자연스럽게 현정은 회장에 대한 동정으로 몰리게 됐던 것이다.이 시점에서 더 이상 여론을 방치할 경우 경영권 분쟁에서 쓴 잔을 마실 수도 있다는 긴박감이 정 명예회장으로 하여금 석명서를 발표하게 한 배경이 됐다.정 명예회장은 서두에서 “정몽헌을 궁지로 몬 사람들이 모든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는 수 없이 진실의 일정 부분이라도 밝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운을 뗀 뒤 고 정몽헌 회장에게 정 명예회장 자신이 수차례 도움을 줬던 사실들을 열거했다.

2001년 2월 현대전자로부터 남자농구단을 인수해준 일, 정몽헌 회장 명의의 용인 소재 토지를 매입해준 일 등을 들었다.그러면서 정몽헌 회장이 자살하기 3주전인 7월15일경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7.5%를 사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거절한 것을 후회했다. 정몽헌 회장이 지분 매입을 부탁한 이유는 현대종합상사가 계열분리를 앞두고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7.5%를 처분해야 하는 상황에서 경영권을 안정화시키려면 반드시 우호세력에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이때 정상영 명예회장이 6월경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의 주식을 취득한 것은 주요 고객사에 대한 장기적인 영업력을 유지하기 위한 마케팅차원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우 적당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정몽헌 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 명예회장은 논란이 심화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매입 경위에 대해서도 말문을 열었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2.5% 담보의 설정 등은 정몽헌을 보호해주려는 것이었지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의도로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전제하고 비화를 공개했다.2001년 8월 정몽헌 회장이 교보생명의 차입금을 상환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던 중 금호생명으로부터 290억원의 대출을 신청했으나 담보가 부족하자 정상영 명예회장을 찾았다. 정 명예회장은 처음 200억원을 보증할 때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제공하고 추가로 90억원을 보증할 때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2.5%와 정몽헌 회장의 집을 담보로 잡게 됐는데 이는 채권단으로부터 정 회장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 명예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확보할 목적이었으면 왜 처음부터 200억원의 보증에 대하여 담보를 요구하지 않았겠으며, 또 290억원이면 당시 장내에서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를 하지 않았겠습니까”라며 “주식을 담보로 잡은 경위를 알면서도 처음부터 지분을 확보할 목적이라 함은 본인의 진의를 악랄하게 왜곡하는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라고 주장했다.최근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지분 처분 명령을 받을 것으로 알려진 사모펀드에 대해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대 고위층의 요청에 의해 현대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9월초 현정은 회장이 고 정몽헌 회장의 유산을 상속받지 않기로 한 정황에서부터 말을 꺼냈다. 정 명예회장은 현 회장이 상속을 포기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정몽헌 회장의 채무를 대신 갚아주고 주식을 찾아오기 위해 290억원을 마련했는데 현대경영진으로부터 현대상선 지분 매입을 요청받아 이를 수락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의 사모펀드는 추가로 지분을 매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가가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활용한 차원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9월15일까지 M&A의 주체가 떠오르지 않자 10월말까지 이를 다시 팔기 시작하며 아직 M&A의 위험이 남아있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을 취득했다고 정 명예회장은 주장했다.정상영 명예회장은 석명서를 발표하게 된 원동력은 역시 김문희 여사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음을 뚜렷이 했다. 정 명예회장은 “김문희씨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매입경위를 보면 김문희씨는 2001년 1월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 18.57%를 사들였고, 여기에 들어간 돈은 84억원 가량이었습니다. 결국 100억원도 채 되지 않는 돈을 들여 김문희씨는 현대상선 등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몽헌의 타계 후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사주는 것이 정몽헌과 그 유족의 지배권을 도와주는 것으로 알고 현대가에서는 도왔으나, 결국 김문희씨의 지배권을 도와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라며 김문희 여사에 대한 짙은 반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정상영 명예회장은 장문의 석명서를 발표함과 아울러 법원에는 현대엘리베이터가 금강종합건설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처분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데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이로써 경영권 다툼은 절정으로 치닫게 됐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양측의 대안과 대책이 속속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석명서를 발표하며 뒤늦게나마 대의명분을 만든 것도 격전을 앞둔 비장함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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