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9>
삼 불 망(三不忘) - <9>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8-06-25 17:01
  • 승인 2018.06.25 17:01
  • 호수 1259
  • 6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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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반 시각 쯤지났을까. 네 소년은 산채에 도착하여 두령이 거처하는 방으로 인도됐다. 두령 만적은 애꾸눈에다가 상처투성이의 험상하고 야만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들을 흥미롭게 쳐다본 후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 아이들의 눈을 뜨게 해줘라.”
소년들은 성거산에 산적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노인으로부터 들었지만, 막상 산적 두령을 면전에서 마주보자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했다. 두령은 짙은 눈썹과 번뜩이는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 무서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이제현은 ‘호랑이한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말을 생각하고 기죽지 않고 말했다.
“두령님의 위세와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의적(義賊)들은 조정의 탐관오리들을 주벌하고 민초들을 보호한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두령께서는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을 이다지 못살게 구는 것입니까?”
“어린 놈이 입은 달려 있어 말은 잘하는구나. 허허. 그런데 너의 아비는 어디서 무엇 하는 누구냐?”
“대사성밀직승지(大司成密直承旨) 이진(李) 대감이십니다.”
“이진 대감이라……. 그러면 혹시 옛날에 안동부사를 역임한 어른이 아니시냐?”
“맞습니다. 그분이 바로 저의 부친이십니다.”
두령 만적은 표정이 누그러지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저 아이들의 오라를 풀어줘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네 소년에게 두령은 말을 이었다.
“이진 대감은 20년 전에 안동부사를 역임하면서 민폐를 없애고 서원을 일으키는 데 크게 공헌했지. 당시 나도 안동에 살았는데 토호(土豪)들의 수탈에 참다못해 그들의 앞잡이를 죽이는 죄를 짓게 되었지. 다행히 이진 부사는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정상을 참작하여 나의 목숨만은 살려준 은전을 베풀어주셨다. 5년 후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나는 사면을 받아 다시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으나 사는 게 막막하여 유랑 걸식하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이제현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산적 두령이 방금 한 말을 들어보니 자기들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을 계속했다.
“두령님, 이제 죄 없는 저희들을 풀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풀어주다마다. 여봐라. 날이 저물었으니 이 아이들을 말에 태워 개경까지 데려다주고 오너라.”
이렇게 하여 네 소년은 산적들의 인도를 받아 산채에서 나와 개경 탄현문까지 편안히 올 수 있었다. 해시(亥時, 21시~23시)쯤 되었을까. 이제나저제나 하고 탄현문 밖에서 마음을 졸이며 자식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던 가족들은 멀리서 요란한 말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쪽으로 뛰어나갔다. 소년들이 급히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자, 가족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워 했다. 
“아니, 얘들아. 집으로 바로 안 오고 도중에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나는 거야. 우리가 너희들을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송구스럽사옵니다. 하지만 그럴 사정이 있었사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이제현은 산적들에게 납치되었던 일을 자초지종 이야기했다. 
“산적들은 저희들을 부잣집 도령으로 오인하고 납치했는데, 두령 만적이 자신을 구해준 아버님과의 과거의 인연을 생각하여 그냥 놓아준 것 같사옵니다.”
가족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돌아온 어린 자식들이 한편으로는 대견하기까지 하였다. 
그날 밤, 집으로 귀가한 이제현은 아버지 이진에게 박연폭포에서 노인을 만났던 일화를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중국에는 ‘태어나서 장가계(張家界)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살이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 인생부도장가계 백세기능칭노옹)’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단다. 한(漢)나라 재상 장량(張良)의 스승 황석공(黃石公)이 도를 닦던 곳이 장가계인데 박연폭포처럼 기암괴석이 일품이란다. 박연폭포가 있는 성거산에도 황석공같은 도인이 살고 있는데, 네가 만났던 노인이 바로 그 부소대사(扶蘇大師)였구나. 그는 불법만을 깨우친 것이 아니라 천문·지리·병서·점술 등에 능하여 스님 중에 용이란 뜻의 ‘승중용(僧中龍)’으로 불린단다.”
이제현은 박연폭포에서 궁금했던 점을 다시 물었다.
“아버님, 그 도인께서 싸리나무 뭉치를 건네주며 꺾어보라고 했는데 아무도 꺾지 못하자, ‘너희들이 힘을 합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했사옵니다.” 
그러자 이진은 껄껄 웃으면서 설명을 했다.
“너희들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는 광경을 지켜본 부소대사가 친구들 간의 신의를 중시하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몽골의 칭기즈칸이 열세 살 때 이복동생 중 한 명을 활로 쏘아 죽인 일이 있자, 어머니 호엘룬은 테무친을 엄하게 꾸짖고 형제가 단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형제들을 불러 ‘화살 한 다발을 꺾어보라’고 한 일화가 전하고 있단다. 아마도 부소대사는 칭기즈칸의 형제들에게 준 호엘룬의 가르침을 너희들에게 전한 것 같구나.”
그제야 의문이 풀린 이제현은 칭기즈칸을 훈육한 호엘룬과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부소대사가 시공을 초월해서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어린 신동(神童)의 첫사랑

정해년(1287, 충렬왕13)은 고려 역사에 뜻있는 한 해였다.
이 해는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은 지 28년째 되는 해였다. 정국은 자주국으로서의 존립마저 위태롭고, 부원세력들의 반국가·사회적인 책동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따르는 법. 고려가 정치적·군사적 열세로 인해 원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 불가능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 고려의 강역(疆域)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각의식이 싹터 역사서술로 나타난 것이 이 시점이었다.

이승휴(李承休)는 신진 유학자로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세력을 비판한 10개조의 상소를 올린 결과 파직을 당하여 강원도 삼척 두타산 아래 천은사(天恩寺)에 은둔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제왕운기>는 우리 역사의 시발점을 단군조선으로 보고 발해를 한국사에 최초로 편입시켜 우리 민족의 활동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확장했다. <제왕운기>의 탄생은 원나라에 대한 저항의식의 소산으로 새로운 사회의 희원(希願)을 시로 적은 것이다.  
1287년. 개경의 겨울은 유난히 더디게 찾아왔다. 
양광이 따사로운 만추(晩秋)의 계절은 가고, 아침저녁으로 간간히 북풍이 매섭게 몰아쳤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대지는 얼어붙지 않았고 한낮에는 온기를 느낄 정도로 따뜻했다.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의 집에도 초겨울의 아침 햇살이 마당과 처마, 대들보, 벽으로 쏟아져 집안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진의 집은 개경의 번화가인 광화문(廣化門, 황성의 정문)에서 남대가를 거쳐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의 동남쪽 5리쯤 떨어진 수철동(水鐵洞)에 위치하고 있었다. 
3년 전,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외명부의 정3품 벼슬) 춘천 박씨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박씨 부인에게 말했다.
“개경에서 북동쪽으로 자하동과 탄현문을 넘으면 극락봉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며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磨崖佛, 자연 암벽에 조각한 불상)을 이루면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아들을 얻을 수 있으니 포덕(布德, 전도)함을 잊지 말라.”
그해 11월 경진일 아침. 이진의 집에는 경사가 났다. 고대하던 셋째 아들 이제현이 태어난 것이다. 작은 바위 하나가 물줄기의 흐름을 바꾸듯, 부처님의 가피(加被,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함)를 받고 태어난 아이 하나가 고려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꾼다. 붓 한 자루로 고려 사직을 지킬 명신 이제현은 이렇게 태어났다.
진한국대부인 춘천 박씨의 지극 정성 덕분인지 이제현은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늘씬한 몸에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키가 컸으며 뚜렷한 이목구비는 강직한 품성을 예견했고, 곧게 뻗은 콧날에 눈썹은 짙었다. 

“문성(文星)의 정기가 모여 한 신동을 낳았어.”
“우리 송악에 큰 인물이 났어.”
“세 살짜리 꼬마가 천자문을 줄줄 왼다네.”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은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庵)으로 삼한공신 금서(金書)의 후손이다. 금서는 태조 왕건을 도와 중원태수호부낭중의 관직에 있을 때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갔는데 이들의 3녀가 금서의 부인이다. 이진은 결국 외가의 혈통이 왕건과 경순왕의 피를 물려받고 있으니 명문가의 자손임에 분명하다. 이진은 삼형제 중 둘째로, 성품이 근엄한 어머니 김씨로부터 경전과 사서(史書)를 배웠다. 
이진은 대능직(戴陵直)을 지낸 박인육(朴仁育, 월성 박씨의 증시조)의 딸인 월성 박씨와 결혼하였는데 자신보다 일곱 살 아래였다. 이진은 재상급인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역임하여 관료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너그럽고 백가에 박통하고 시에 능했다. 이진은 형님과 동생이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카들을 잘 가르치고 길러서 대대로 가업(家業)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형님의 두 아들과 동생의 아들, 그리고 자신의 장남 이관과 삼남 이제현 등 5명이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차남은 불가에 입문한 체원(體元) 스님이다. 이처럼 과거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한 가족들의 내력만 보더라도 이진의 핏줄 속에 흐르는 선비 관료의 전통을 헤아려 보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민지(閔漬)는 이진의 덕을 축하하는 시를 남겼다.

세 집에 형제간은 다섯 장원이니
사람들 모두 이백의 재주라 하네.


공을 알겠네, 적선은 정말 짝할 리 없고유독 해마다 경축연을 여는 걸 보니.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