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고려 최고의 직업은 관료

고려인들이 꿈꾸던 최고의 직업은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직업의 종류가 지금처럼 많지 않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가 엄격하던 그 시절에 관료는 당대 최고의 신분층이었으며,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곧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시대상을 이규보(李奎報)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시골에서 쓸쓸히 지내니
세파의 곤궁함을 어찌 견디리.
목 내밀고 한번 나가고 싶으니
부디 도와주시면 얼마나 좋겠소.

이제현은 일찍부터 아버지 이진의 영향을 받아 글 읽기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관료의 꿈을 키워나갔다. 아버지의 재기(才氣)를 이어받은 것인지 그의 학문적인 성취는 가히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 
이진은 아들 제현이 스스로 절차탁마토록 하고, 항상 남들의 칭찬에 우쭐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제현아, 학문을 연마하는 데 자만은 금물이다. 공자님도 ‘읽던 책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韋編三絶 위편삼절)’는 고사처럼 수불석권(手不釋卷)하였으며, 고려를 빛낸 선현들도 너와 같은 나이에 불면불휴(不眠不休)의 자세로 학문에 정진했다.”
이처럼 이제현은 아버지 이진으로부터 명철보신(明哲保身)과 겸양지덕(謙讓之德)의 가르침을 배우고, 진중한 성품과 학문적 소양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진은 어린 이제현에게 학문하는 방법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문에 임하는 데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는 법이다. 그 순서를 잘 지켜 학문을 연마하면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문의 입문서인 《천자문(天字文)》을 시작으로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효경(孝敬)》을 익히고 난 후에, 《사서오경(四書五經)》,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순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또한 말타기와 궁술을 익히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선비는 때로는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진은 역사의식에 대해서 아들 이제현에게 소상하게 가르쳤다.
“제현아. 우리 고려는 원나라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급속도로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세계 제국을 이룬 원나라가 고려를 무력으로 정벌하는 것을 포기하고 유독 고려에만 공주들을 시집보내 회유정책을 편 이유는 항몽전쟁에서 보여준 고려인의 투지와 저력 때문이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국력을 신장시켜 자주 독립국가의 체모를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야.” 
호기심이 강한 이제현은 송도와 송악산에 얽힌 전설을 알려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댔다.
“개경의 진산인 송악산은 우백호(오공산)가 세력이 강하고 좌청룡(자남산)이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고려에는 명상(名相)이 드물고 무신들이 자주 싸움을 일으킨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단다.”
“아버님, 소자는 명상이 되고 싶은데 전설에 따른다면 문신으로 입신양명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옵니까?” 
“전설이나 민담이 사람의 운명을 함부로 가로막지는 못하는 법이란다.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하면 너의 뜻을 이룰 수 있을 테니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거라.”
아버지 이진으로부터 어느 정도 가학(家學)을 마친 이제현은 권부(權溥)의 문하생으로 입문했다. 권부는 안향(安珦)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여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를 간행한 당대의 대학자였다. 
권부는 학문적 소양이 뛰어난 이제현, 박충좌, 최해, 안축 등 많은 제자들에게 학문뿐만 아니라 고려의 현실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가르쳤다.
“무신정권을 거치면서 국가의 기강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나, 이런 와중에도 일연(一然) 스님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일깨우고 민족의 혼을 되살렸고, 안향 선생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성리학을 도입하여 학교를 재건하고 인재들에게 춘추대의에 의한 명분주의 정신을 가르쳤다.”
또한 권부는 과거에 임하는 선비는 임기추상(臨己秋霜)의 자세로 겸허하게 자신을 다스려야한다고 가르쳤다.
“세상의 신고(辛苦)를 겪지 않고 책상물림만 하다 너무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출세를 하면 교만해지고 그 교만함이 결국 인생을 불행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에 ‘소년등과(少年登科)’가 능사는 아니다. 과거에 낙방하는 쓰라린 경험과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들이 오히려 대기만성(大器晩成)하는 경우가 있고, 역사를 상고해 보면 주나라 태공망(太公望, 강태공)이나 당나라 위징(魏徵)처럼 늦깎이 가운데 커다란 성취를 이루어 낸 인물도 많다. 또한 재주가 출중하고 문장이 좋으면 그 재주와 능력을 믿고 안일함에 빠져 인생이 불행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유고재능문장(有高才能文章)’이 능사는 아니다. 이처럼 과거가 선비의 입신양명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학문은 고려 사직과 백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올바르게 쓰여야 한다.” 
그리고 권부는 나라를 빛낸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제자들이 지향해야 할 학문의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서 7년 만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 그는 ‘당나라에 가서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는 아버지의 뜻을 3년이나 단축시켰으며, 황소의 난 당시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이를 비난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그 이름이 중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불멸의 인재였다.” 
이제현은 스승 권부의 종횡무진한 강론에 학문적인 갈증이 단숨에 해갈되는 시원함을 느꼈다. 그리고 스승의 말뜻을  곱씹으며 기울어가는 고려 사직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정치가로서의 포부를 키워가고 있었다.세월이 흘러 열 살이 되던 해 정월 초하룻날. 이제현은 송악산 푸른 숲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산에도 이름이 있고 사람에게도 이름이란 것이 있다. 내가 그럭저럭 살다 죽으면 내 이름도 사라질 것이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 했다. 대장부로 태어나 보람되게 살다 죽으면 내 육신은 썩어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송악산처럼 영원할 것이다. 
그렇다. 나도 쓰러져 가는 신라 천년사직을 구하기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최치원처럼 기울어가는 고려 사직을 위해 불꽃같이 살자. 그리하여 반원개혁운동을 펼쳐 잃어버린 옛 관제와 강토를 되찾고 원의 간섭을 종식시키자.”  

아름다운 스승의 둘째 딸

스승 권부에게는 네 딸이 있었다. 
권부는 유난히 둘째 딸 권난(權蘭)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하였다. 난이는 초승달 같은 아미,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맑은 눈, 복사꽃 빛 감도는 뺨을 가진 단아하고 우아한 처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난이의 미묘한 매력은 선명하고 티 없이 맑은 눈동자였다.   
그녀는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남들이 자신의 미모를 칭찬할 때면 부끄러워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우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빼어난 자태도 그녀가 타고난 지적인 성격과 능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녀야말로 문(文)과 색(色)을 고루 갖춘 재원(才媛)이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문생들의 눈길은 스승의 이 아름다운 딸 난이에게로 쏠렸다. 실로 그 누가 그녀의 현숙함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소년 이제현의 가슴속에도 언제부턴가 난이에 대한 연모의 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처녀들과는 분명히 다른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토록 맑고 순수할 수 있을까?’
이제현은 난이를 생각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마력이 그녀에겐 있었던 것이다.
1300년(충렬왕26) 이른 봄날 초저녁이었다. 하루 공부를 끝낸 권부학당의 저녁은 한없는 정적에 잠겨 고요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가야금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네 살 이제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야금의 음향을 따라갔다. 아니 몰래 다가가고 있었다. 가야금 소리는 속삭이듯 재잘거리고, 마치 봉황이 노래하는 것 같고, 물고기가 물속으로 급강하하다가 갑자기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아서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난이는 어디선가 사람의 인기척이 나자 가야금 연주를 멈추었다.
이제현은 난이에게 들킬까 봐 급히 몸을 숨기며 돌아섰지만, 그만 자신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발걸음을 급히 돌린 이제현은 자신과 난이를 곰곰이 비교해 보았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그녀, 각촉부시(刻燭賦詩, 시짓기 속작시합)에서 일등을 도맡아 하는 자신, 두 사람은 어쩌면 잘 어울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현은 하루하루 학문하는 배움의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다. 무엇보다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서 학문적 성과가 집적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난이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의 무아의 감정을 가끔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난이는 용모로나 성품으로나 나무랄 데 없는 여자다. 그녀는 한낱 권부학당의 평범한 딸이 아니라 세상 모든 여성의 표본적인 모습이 한데 응결된 그런 존재이다. 그녀와의 운명적인 관계가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 것이며, 내 전생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제현은 셀 수 없이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파도같이 밀려드는 그리움을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다. 이제현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연정(戀情)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애를 태웠지만 선뜻 자신의 마음을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애간장만 태우고 있는 이제현에게 어느 날 최해가 다가와 말했다.
“제현아, 너 상사병 걸린 거 맞지?”
“…….”
이제현의 등줄기에서는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물건을 훔치려다가 들킨 도둑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안축과 박충좌는 모두 자네가 난이 아가씨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네. 자네 혼자만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네.”
이제현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난이 아가씨를 몇 번이나 만났지?”
“한 번도 못 만났어.”
“우리가 도와 줄 테니 걱정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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